2023.10.04 현대 모터스포츠팀
유럽에서의 3연전을 마친 월드랠리챔피언십(World Rally Championship, WRC)는 다시 지구 반대편 남미로의 긴 여정에 올랐다. 2023 시즌의 11번째 라운드가 펼쳐진 칠레는 지난 2019년 WRC를 처음 개최했다. 하지만 칠레는 2020년에는 전국적인 시위로, 2021년에는 코로나19 사태로 경기를 개최할 수 없었다. 4년 만인 2023년이 되어서야 두 번째 WRC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경기가 열리는 비오비오(Bío-Bío)주는 막대처럼 기다란 칠레 국토의 한중간에 있다. 주도이자 칠레 제3의 대도시인 콘셉시온(Concepción)의 카리엘 수르 공항 근처 인근 공터에는 4년 전과 마찬가지로 서비스 파크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경기가 열리는 코스가 과거와 많이 달라져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올해는 16개 SS의 320.98km 구성으로 비교적 콤팩트했다.
산을 끼고 도는 칠레는 코너가 많고 노면이 대체로 부드럽다. 하지만 경사진 코너가 많아 의외로 속도는 높은 편이다. 남미는 계절적으로 초봄이라 경기가 시작되는 이른 아침에는 기온이 내려가고, 산 위쪽은 더욱 춥다. 피렐리에서는 소프트 컴파운드의 스콜피온 SA 타이어를 기본으로 하드 컴파운드를 옵션으로 준비했다.
현대 월드랠리팀(이하 현대팀)은 티에리 누빌(Thierry Neuville)과 에사페카 라피(Esapekka Lappi), 그리고 티무 수니넨(Teemu Suninen)을 엔트리했다. 사실 4년 전 칠레에서 현대팀의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세바스티앙 로브(Sébastien Loeb)가 3위를 기록하며 포디엄 피니시는 달성했지만, 누빌은 SS8에서 사고로 리타이어했고, 미켈센(Andreas Mikkelsen)은 7위에 그쳤다.
이번 경기를 앞둔 누빌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전 경험은 경기 준비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칠레 랠리는 지금까지 한 번 밖에 열리지 않은 데다 이번에는 새로운 스테이지도 많기 때문이죠. 그래서 레키(recce, 사전 정찰 주행)가 무척 중요합니다. 지난번에는 큰 사고로 힘든 경기를 했지만 올해는 포디엄에 오르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운전은 물론 경주차의 컨디션도 좋아야겠죠. 노면에 맞는 세팅도 필요합니다.”
지난 2019년, 시트로엥 소속으로 6위를 기록했던 라피도 칠레 랠리에 대해 입을 열었다. “칠레는 전체적으로 속도가 빠른 랠리로 에스토니아나 핀란드와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립 자체는 그다지 높지 않아요. 엄청나게 거친 건 아니어서 과할 정도로 조심할 필요는 없지만, 빠르게 달리기 위해서는 자신감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랠리 1머신을 담당하는 수니넨은 이번 시즌 현대팀에서 6번째 출전이다. 그는 무엇보다 좋은 페이스 노트 만들기가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참고로 수니넨은 2019년 M스포트 포드 소속으로 칠레에서 5위를 차지했다.
한편, 도요타 월드랠리팀(이하 도요타)은 칼레 로반페라(Kalle Rovanperä)와 엘핀 에반스(Elfyn Evans), 그리고 다카모토 가츠타(Takamoto Katsuta)를 출전시켰다. 그리스 우승으로 점수 차를 더욱 벌린 로반페라는 이번 경기 결과에 따라 챔피언 타이틀을 확정 지을 가능성이 있다. 포인트 2위인 에반스와 33점 차여서 27점을 더 득점하면 자력으로 챔피언이 된다. 제조사 부문에서는 도요타가 현대팀보다 13점 이상 득점할 경우 타이틀을 확정 짓게 된다.
M스포트 포드에서는 오랜만에 4대의 랠리1 머신을 준비했다. 타낙(Ott Tänak)은 WRC 칠레의 유일한 우승자다. 타낙과 루베(Pierre-Louis Loubet) 외에 현지 출신인 알베르토 헬러(Alberto Heller)를 엔트리했고, 개인 자격으로 참전 중인 세르데리디스(Jourdan Serderidis)의 호의로 신예 그레고와 뮌스터(Grégoire Munster)가 랠리1 데뷔 기회를 얻었다. 벨기에/룩셈부르크 2중 국적인 뮌스터는 지난해 현대자동차 드라이버 육성 프로그램을 거친 24세의 신예다. 이후 M스포트로 옮겨 WRC2 클래스에 도전해 왔다. 헬러는 2019년 칠레 랠리 WRC2 클래스에 출전했지만 완주하지는 못했다.
WRC2에서는 포인트를 리드하고 있는 안드레아 미켈센(Andreas Mikkelsen)이 출전하지 않은 가운데, 요한 로셀(Yohan Rossel), 거스 그린스미스(Gus Greensmith), 사미 파야리(Sami Pajari) 등이 타이틀 획득을 위한 막판 경쟁에 돌입했다.
목요일에는 테스트 주행만 진행됐다. 서비스 파크 남쪽, 비오비오강 건너편에 마련된 5.75km 코스를 최대 5번까지 달릴 수 있었다. 챔피언십 포인트 1위를 사수 중인 로반페라를 선두로 테스트 주행이 시작됐다. 선선한 날씨에 비가 조금 내려 노면은 축축이 젖어 있었다. 이날 저녁 칠레 관중들의 열광적인 환영인사를 받으며 로스앙헬레스에서 식전 행사를 치른 선수들은 29일 금요일 아침부터 본격적인 경기에 돌입했다. 남동쪽에 마련된 스테이지는 4년 전과 일부 구간이 겹친다. 19.77km의 SS1 풀페리아(Pulperia)를 시작으로 레레(Rere, 13.34km)와 리오 클라로(Rio Claro, 23.32km)를 반복해 달리는 112.86km 구간이다.
오프닝은 타낙이 잡으며 종합 선두로 올라섰다. 핀란드에서 리타이어, 그리스에서는 포디엄 등극에 실패하며 타이틀 경쟁에서 밀려난 울분을 토해내는 듯했다. 로반페라는 노면을 청소하느라 다소 뒤처졌다. 칠레처럼 크고 작은 자갈이 깔린 노면에서는 먼저 출발하는 선수가 상당한 핸디캡을 떠안아야 한다.
에반스, 수니넨, 그리고 타낙이 초반부터 치열하게 맞붙었다. 오전 2개 스테이지(SS2, SS3)를 에반스가 잡아 선두에 올랐고, SS4(Pulperia, 19.77km)에서는 수니넨이 에반스를 밀어내고 올라섰다. 타낙은 네 바퀴 모두 소프트를 끼고 오후 SS5, SS6에서 톱타임을 기록했다. 대부분의 선수는 하드와 소프트 타이어를 섞어 사용했다.
현대팀의 라피는 경기 시작과 함께 리타이어했다. SS1 막판에 브레이크를 늦게 밟는 바람에 코너 안쪽에 충돌해 차체는 물론 롤케이지까지 크게 손상되었다. 고칠 수 없는 수준이라 라피는 경기를 완전히 포기했다. 다음 불운의 주인공은 루베였다. SS4에서 코스를 벗어난 차가 구르며 대파되었다. 누빌은 건조하고 미끄러운 노면에서 그립을 확보하지 못해 첫 스테이지에서 선두와 12.3초가 벌어졌다. 그래도 서스펜션을 조정한 것이 효과를 보아 오후에는 페이스를 되찾았다.
첫날을 마치는 시점에서 타낙이 종합 선두를 잡았다. 현대팀의 수니넨이 4.2초 차이로 그 뒤를 바싹 쫓았다. 수니넨은 SS4에서의 활약으로 선두가 되었지만 라디에이터 누출과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트러블로 타낙의 추월을 허용했다. 3위는 에반스였고, 누빌은 에반스에 15초 뒤처진 4위였다. 로반페라와 가츠타가 5, 6위를 이었다.
로반페라는 SS6에서 잔디밭에 뛰어들었고, 가츠타는 SS5에서 점프 착지 후 실수로 시간을 잃었다. 랠리1 신참 듀오 뮌스터와 헬러는 각각 7위와 10위를 기록했다. 뮌스터는 코드라이버 루이스 로우카(Louis Louka)가 오전에 페이스 노트를 분실하는 바람에 스마트폰을 보며 달려야 했다. WRC2에서는 파야리가 종합 8위이자 클래스 선두에 오른 와중에 올리버 솔베르그가 13초 차이로 뒤에 있다.
9월 30일 토요일은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산악지역을 달리는 이날은 4년 전과 구성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km가 넘는 장거리 스테이지 3개를 반복해 달렸다. SS7~SS12 6개 스테이지는 이번 경기 최장인 154km 구간에서 치러졌다. 금요일, 일요일에 비해 토요일 스테이지는 거칠고 단단해 타이어 마모에 많은 신경을 쏟아야 했다. 일부 선수들은 완전히 다른 랠리라고 표현할 정도. SS8, SS11의 리오리아(Rio Ria, 21.09km)는 유일하게 2019년 경기와 동일한 구성을 유지했다.
이 날 성적은 타이어에서 갈렸다. 타낙은 소프트로 재미를 본 전날과 달리, 소프트와 하드를 섞어 사용했다. 반면에 소프트만 골라 담은 도요타 트리오는 완전한 실패였다. 로반페라는 오프닝 치빌링고(Chivilingo, 27.23km)에서 톱타임을 기록했지만 너무 빨리 닳는 타이어를 관리하느라 이후 페이스를 유지할 수 없었다. 에반스와 가츠타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반면 현대팀에게는 기회였다. 수니넨은 SS7에서 에반스에게 추월을 허용했다가 SS9(Maria De Las Cruces, 28.72km)에서 다시 2위로 복귀했다. 누빌 역시 이때 에반스를 제치고 3위로 올라섰다.
타낙은 6개 스테이지 중 4개를 잡으며 추격자들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종합 선두로 토요일을 마감했다. 특히 스페어로 하드 타이어 2개를 아꼈다가 최장 스테이지 SS9에서 하드 타이어 4개로 마음껏 푸시하는 작전으로 재미를 보았다. 2위 수니넨과는 거의 1분까지 격차를 벌렸다. 수니넨은 스페어 타이어를 하나만 실어(하드 3개, 소프트 2개) 무게는 덜었지만 타이어 수명에는 여유가 없었다. 누빌은 수니넨과 1분 12초 차이로 3위에 올랐으며, 4위 에반스와의 시차는 10.7초에 불과했다. 로반페라와 가츠타는 각각 5위와 6위를 차지했다.
WRC2의 솔베르그와 그린스미스, 그리고 파야리와 로셀이 그 뒤를 이었다. 토요일을 13초 차 선두로 시작했던 파야리는 SS7에서 흙먼지 때문에 거의 40초를 잃고 솔베르그의 추월을 허용했다. 뮌스터는 SS12에서 충돌로 스티어링 계통이 파손됐다. 헬러 역시 헤어핀 코너에서 바위와 충돌해 속도가 떨어졌다.
10월 1일 일요일은 서비스 파크 동쪽에 새로 마련된 스테이지 2개를 반복해 달렸다. 4개 스테이지 합산 거리는 54.12km였고, 파워 스테이지는 13.86km의 엘포넨(El Poñen)이었다. 현대팀 듀오는 마지막 추격의 의지를 불태우며 경기를 시작했다. 오프닝 라스 파타구아스(Las Pataguas, 13.2km)부터 2연속으로 1,2위를 기록한 누빌과 수니넨이 타낙과의 시차를 줄였다. 누빌의 드라이버즈 타이틀 획득 가능성이 아직 남은 현대팀은 누빌과 수니넨의 순위를 바꾼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리였다. 4위 에반스가 바짝 따라붙어 자칫 더 큰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누빌은 과감한 푸시로 2연속 톱타임을 기록해 13.9초였던 수니넨과의 시차를 6.7초까지 줄였다. 아울러 추격자 에반스와의 시차도 20.8초로 벌렸다.
그런데 오프닝 라스 파타구아스를 다시 달린 SS15에서 현대팀에게 비보가 전해졌다. 얕은 점프 직후 길 오른쪽에 있던 나무 그루터기를 밟은 수니넨이 천천히 속도를 줄였고, 결국 수니넨은 이로 인해 리타이어했다. 현대팀의 더블 포디엄의 기회가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누빌은 2위가 되고, 에반스가 포디엄에 들어섰다. 최종 파워 스테이지에서는 드라마가 일어나지 않았다. 로반페라가 추가로 5점을 챙겼고 에반스, 누빌, 타낙, 가츠타가 1~4점을 나누어 받았다.
결국 오트 타낙이 2019년 이후 다시 한번 칠레 랠리의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금요일과 토요일에 타이어 작전이 맞아떨어져 라이벌들을 크게 앞설 수 있었다. 대량 득점에 성공했지만 챔피언십 순위는 그대로였다. 2위는 누빌이 차지했다. 기대했던 우승은 아니지만 로반페라가 4위에 머물렀기 때문에 드라이버즈 타이틀은 아직 실낱 같은 희망이 있다. 현재 누빌은 챔피언십 3위로, 2위 에반스와는 31점의 차이가 있다. 에반스가 3위로 포디엄 마지막 자리를 차지했고 로반페라와 가츠타가 차례로 4, 5위를 기록했다. 올리버 솔베르그를 필두로 그린스미스, 파야리, 로셀, 그리야진 등 WRC2 세력이 6~10위를 차지했다. 참고로 수니넨의 막판 리타이어로 현대팀의 더블 포디엄이 무산되면서 이번 시즌 제조사 부문 챔피언 타이틀은 도요타가 가져갔다.
WRC 2023 시즌은 중앙 유럽과 일본이라는 2개의 타막 랠리만을 남겨두었다. 10월 26~29일 열리는 중앙 유럽 랠리는 단독 개최의 부담을 덜기 위한 방편으로 3개국 공동 개최라는 방식을 취했다. 체코 프라하에서 시작해 오스트리아와 독일 3국 국경을 넘나들며 불꽃 튀는 막판 타이틀 경쟁이 펼쳐질 예정이다.
글. 이수진 (자동차 평론가)
1991년 마니아를 위한 국산 자동차 잡지 <카비전> 탄생에 잔뜩 달아올라 열심히 편지를 보냈다가 덜컥 인연이 닿아 자동차 기자를 시작했다.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편집장과 편집 위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자동차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전기차와 커넥티드카, 자율주행 기술 같은 최신 트렌드를 열심히 소개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름 냄새 풍기는 내연기관 엔진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자동차 덕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