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를 빛낸 인물들 엑스포를 빛낸 인물들

2023.07.26 현대자동차그룹 분량7분

에디슨, 에펠, 피카소… 엑스포를 빛낸 위인들

엑스포가 172년의 역사를 이어온 건 수많은 인물의 노력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상상력의 전시장 엑스포>의 저자 오룡이 엑스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소개한다.

앨버트 공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하이드 파크

영국 런던 하이드파크 남서쪽 입구인 퀸스 게이트를 들어서면 황금색으로 빛나는 동상이 하나 있다. 화려한 빅토리아 양식의 기둥과 지붕을 갖춘 ‘앨버트 기념비(Albert Memorial)’다. 동상의 주인공은 엑스포의 효시인 1851년 런던박람회를 만들어 낸 앨버트 공으로, 엑스포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망토를 걸친 앨버트 공은 오른손에 책을 들고 앉아있다. 이 책은 다름 아닌 런던박람회 공식 안내서다. 계관시인* 알프레드 테니슨(Alfred Tennyson)은 송시에서 ‘세계를 아우르는 박람회 창시자’라며 그를 기렸다. 기념비는 두 번째 런던박람회를 준비하던 중 1861년 42세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부군을 사무치게 그리워한 빅토리아 여왕이 1872년 세웠다.


*계관시인: 월계관을 쓴 시인. 영국왕실이 가장 뛰어난 시인에게 내리던 칭호

앨버트 공의 동상

엑스포의 기틀을 만련한 앨버트 공의 기념비

인류문명사에 한 획을 그은 엑스포 창시의 공을 영국이 차지한 것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박람회 태동 여건이 먼저 조성됐던 프랑스를 제칠 수 있었던 건 과감한 결단 덕분이었다. 그 이면엔 국제정세에 밝았던 한 지식인의 숨은 활약이 있었다. 바로 자유무역 신봉자였던 영국 공공기록물 보관소 관리관 헨리 콜(Henry Cole)이었다.

콜은 상품교역 제한을 철폐해야 인류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열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프랑스에서 자국 산업기술 보호에 집착하는 소심증에서 벗어나 국제 박람회를 열려는 움직임이 본격화하자 그는 앨버트 공을 찾아가 영국이 박람회를 선점하여 세계 경제·무역 주도권을 거머쥘 것을 역설했다.


그의 주장에 공감한 앨버트 공은 당시로선 뛰어넘기 힘든 벽이던 ‘국제화’ 실현의 견인차가 됐다. 학술원 의장과 함께 박람회 조직위 명예회장도 맡아 실질적인 사령탑 역할을 한 것이다. 당시 영국 사회는 산업혁명으로 축적된 부의 이면에 극심한 계층 갈등과 빈부격차가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엑스포 창시자’, 앨버트 공

앨버트 공의 모습

엑스포를 창시한 인물로 인류 역사에 남은 앨버트 공

하지만 당시 영국 각계에선 런던박람회에 대해 기술 유출과 재정 낭비, 사회 혼란 야기 등을 이유로 반대 여론이 높았다. 의회는 조직위 구성의 전제조건으로 안정적 기금 확보를 내세웠다. 앨버트 공은 박람회가 위기 극복과 사회통합의 발판이 될 수 있다고 반박하며 여론 주도층을 설득해 나갔다. 아울러 부르주아 계층에게 많은 기부금을 받아내고, 내각을 동원하는 데 강력한 추진력을 보였다. 특히 먼저 박람회 개최 의향을 밝힌 프랑스의 참가 약속을 받아낸 일은 영국 외교사의 큰 성과로 꼽힌다. 우려하던 소요 사태는 결국 일어나지 않았으며, 런던박람회는 훗날 앨버트 기념비가 들어서게 되는 그곳에서 성대한 막을 올렸다. 


개막식 날 박람회장 안팎엔 65만 명의 기록적인 인파가 운집했다. 당시 영국은 제국주의 위세와 국운이 정점에 달한 시기였다. 박람회 개막은 대영제국의 영화가 인류 평화와 번영의 제전이란 화려한 꽃으로 만개했음을 선포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박람회의 또 다른 공신은 거대한 온실 형태 박람회장을 설계한 조셉 팩스톤이다. 

크리스탈 팰리스의 모습

‘수정궁’이라 불렸던 전시장에서 첫 번째 엑스포인 런던 엑스포가 열렸다 (출처: https://www.bie-paris.org/)

‘수정궁(Crystal Palace)’이란 별명이 붙은 전시관은 길이 563m, 너비 124m, 축구장 11개 넓이 전시 면적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지방의 무명 원예사이자 조경 건축가였던 팩스톤은 대형 온실 설계안을 들고나와 일약 스타가 됐다. 조직위는 박람회장 국제공모에 응모한 254개 설계안이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해 선정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팩스톤의 온실 제안은 ‘적은 예산으로 짧은 기간 내 지을 수 있고 사후 철거·이전이 가능한 건축 형태’로 평가돼 전격 채택됐다. 수정궁은 조립식 공법을 이용해 불과 17주 만에 외형이 완공됐다. 건설에 들어간 유리만 영국의 연간 생산량의 3분의 1인 8만 4,000㎡에 달했다. 팩스톤은 내부 조경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엑스포의 모습

1851년 런던박람회의 모습 (출처: https://www.bie-paris.org/)

런던박람회의 수정궁은 공원의 30m 높이 느릅나무 세 그루를 감싸 안고, 분수와 인공폭포의 노즐이 1만 2,000개에 달할 정도로 화려한 인테리어를 뽐냈다. 런던박람회 대성공 이후 팩스톤은 비세습 기사 작위를 받고 돈과 명예를 다 얻은 말년을 보냈다. 이후 172년을 이어온 엑스포 나이테엔 수많은 별들이 새겨져 있다. 

인간 상상력의 한계를 넓히다

엑스포의 모습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인류 역사 속 초특급 전시 이벤트들의 기획·창조 부문은 걸출한 위인들의 불굴의 의지와 역량으로 창조됐다. 과학기술과 산업 진보를 이끈 박람회장 역시 늘 영감의 원천이 됐다. 많은 과학자, 발명가, 기술자, 건축가, 학자, 예술가, 기업인들이 엑스포에서 성취동기와 아이디어를 얻고 성과물을 내놓았다. 

나폴레옹 3세의 초상화

엑스포를 개최하기 위해 파리를 한층 나은 도시로 탈바꿈시킨 나폴레옹 3세

19세기 박람회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1세 등 군주나 집권자가 주도했다. 대외적으로 국가 위용을 높이는 패권적 욕망과 내부적으로 국민 통합을 다지는 통치 수단의 양면적 동기가 작동했다. 박람회 전시 콘텐츠에는 인간 상상력의 한계를 넓힌 과학기술 진보의 궤적이 오롯이 담겼다. 


수세식 변기를 발명한 배관공 출신의 조지 제닝스, 색소폰이란 새로운 악기를 들고나온 벨기에 연주가 아돌프 삭스, 연발 권총을 개발한 새뮤얼 콜트, 고무 타이어를 발명한 찰스 굿이어, 녹색혁명의 기수 바인더 수확기를 개발한 사이러스 매코믹, 14인치 구경 대포를 선보인 독일 철강 기술자 알프레드 크루프 등이 초기 세계박람회에서 활약했다. 

재봉틀을 개발한 아이작 싱어는 제품 공개뿐만 아니라 홍보를 위해서도 엑스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재봉틀을 개발한 아이작 싱어는 제품 공개뿐만 아니라 홍보를 위해서도 엑스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재봉틀 혁신을 이뤄낸 아이작 싱어는 엑스포 최초의 기업 전용 전시관을 개설하는 등 사업가 수완을 한껏 발휘했다. 중공업 분야에선 영국 기술자 헨리 베서머가 제철 혁명을 이끈 고로를, 증기엔진의 달인 조지 헨리 콜리스와 여성 발명가 에마 앨리슨은 당대 최고의 동력 기계류를 선보였다. 


벨기에 전기기술자 제노브 그람은 발전기와 모터를,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전화기를, 필로 레밍턴은 최초의 실용적 타자기를, 독일 기술자 루돌프 디젤은 디젤기관을 내놓아 새로운 문명의 주춧돌을 놓았다. 수많은 발명가 가운데 엑스포의 슈퍼스타는 역시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었다. 

에디슨과 그가 개발한 축음기의 초기 형태

토머스 에디슨과 그가 발명한 축음기

1878년 파리박람회에 처음 등장한 에디슨은 정규 기술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발명의 마력을 발휘해 찬사를 받았다. 그가 축음기에 자신의 음성을 녹음하여 대중에게 들려준 시연은 엑스포 역사 속 명장면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에디슨은 1915년 샌프란시스코박람회까지 참여하며 전구, 확성기, 활동사진, 대륙횡단 장거리전화 등을 출품해 전기기술 진보에 앞장섰다. 

불굴의 의지로 혁신을 관철시키다

뉴욕 엑스포의 모습

1939년 개최된 뉴욕 엑스포 (출처: https://www.bie-paris.org/)

20세기 들어 미국이 주도한 엑스포에선 발명가, 과학자, 개인보다 기업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에디슨의 제자 격인 헨리 포드가 1915년 샌프란시스코박람회에 자동차 조립라인을 지은 이래 기업 전시관은 관례화됐다. 1939년 뉴욕박람회는 그런 경향의 절정이었다. GM, 웨스팅하우스, 코카콜라 등 미국 거대기업들은 저마다 ‘미래세계 건설’의 주역임을 자처했다. 


이후 엑스포는 혁신 디자인의 쇼케이스이자 근현대 건축의 실험장이 돼왔다.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가들이 예술성 높은 조형물을 창출했다. 모더니즘 건축의 대가 르코르뷔지에,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설계자 야마사키 미노루, 천재 건축가이자 미래학자 리처드 버크민스터 풀러, 도시설계의 일인자 단게 겐조 등 거장들이 혁신적 조형물로 건축양식을 선도했다. 

역대 엑스포 한국관은 김중업·김수근 등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들의 손을 거쳤다. 조민석 건축가가 설계한 2010년 상하이엑스포 한국관 외면에는 세계적 설치미술가 강익중이 한글을 소재로 한 아트픽셀을 제작해 눈길을 끌었다.

에펠탑 건축 모습

엑스포를 위해 건축된 에펠탑 (출처: https://www.bie-paris.org/)

한편, 구스타브 에펠과 조지 페리스는 엑스포 조형물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영광을 차지했다. 에펠은 엑스포 사상 최고 유산인 ‘에펠탑’에, 페리스는 세계 최초 대관람차 ‘페리스 휠’에 이름을 새겼다. 두 사람은 동시대 철공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인 ‘철의 달인’으로, 세기적 상징조형물을 만들기 위한 공모에 당선됐다. 혁신이 대체로 그렇듯 이들은 우려와 반대를 무릅쓰고 불굴의 의지로 초유의 구조물을 만들어 냈다. 특히 에펠은 역대 박람회에서 다리, 돔 등 철골 구조물을 도맡아 건설하며 쌓은 명성으로 에펠탑 프로젝트에서 안전과 미학을 둘러싼 숱한 비판과 저항을 제압했다.

과학뿐 아니라 예술도 있다

피카소가 그린 게르니카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가 1937년 파리박람회 스페인관 외면 벽화로 전시된 모습 (출처: https://www.bie-paris.org/)

세계적 예술가들도 엑스포 무대를 빛냈다.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대표적인 예다. 스페인 정부의 의뢰로 1937년 파리박람회 스페인관에 설치된 <게르니카>는 전쟁의 참화를 입체파 특유의 파괴적 구성과 비극적 색조로 표현했고, 이 시공을 초월한 인도주의 메시지는 세계인의 공감을 얻었다. 스페인 대표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프란시스 고야는 1929년 바르셀로나박람회 국민의 전당을 예술품으로 장식했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1939년 뉴욕박람회에서 바닷속 세계를 주제로 ‘비너스의 꿈’ 전시관을 지어 각광받았다. 


‘일본의 피카소’로 불리는 오카모토 다로는 1970년 오사카엑스포 상징탑인 ‘태양의 탑’을 만들었다. 미술·사진·건축뿐 아니라 문학·음악·영화 등 다양한 예술가들이 엑스포에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펼쳤다. 윌리엄 새커리, 빅토르 위고, 폴 발레리 등의 문호가 다양한 글로 박람회를 찬양했다. 카미유 생상스, 리하르트 바그너는 엑스포를 기념하는 칸타타와 행진곡을 작곡했다. 

엑스포 속 영상 예술 작품

1967년 개최된 몬트리올 엑스포에서 사람들이 예술작품을 보고 있다 (출처: https://www.bie-paris.org/)

1967년 몬트리올엑스포에선 팝아트가 등장하고, ‘폴리비전’이란 멀티미디어 프로젝트 영상물이 전시관마다 도입됐다. 개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 연주자, 뮤지션들의 공연은 엑스포의 전통이 됐다.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 그리고 둘이 함께 방문한 시카고 엑스포

1893년 시카고박람회와 이곳을 방문했던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 (출처: https://www.bie-paris.org/, https://www.shutterstock.com)

엑스포에서 성취의 영감을 얻은 저명인사들도 있다. 가령 미국 사회운동가 헬렌 켈러는 13살 때 1893년 시카고박람회를 찾았다.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그는 앤 설리번 교사의 인도로 3주 동안 박람회장 구석구석을 돌며 전화기, 축음기, 선박 모형, 금강석 등 온갖 물품을 손끝으로 만져봤다. 켈러는 훗날 회고록에서 “동화와 장난감 속 생활에서 벗어나 현실 세계의 진면목을 배웠다”며 박람회 경험이 사회활동의 원동력이 됐음을 술회했다. 


일본의 노벨화학상(2002년) 수상자 다나카 코이치(64) 역시 1970년 오사카엑스포에서 과학자의 꿈을 키운 ‘반바쿠(万博)* 세대’의 대표주자다. 유년 시절 박람회장 태양의 탑 앞에서 찍은 사진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엑스포 체험에 대해 “평생 마음껏 공상을 펼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반바쿠(万博, 만박): 일본에서 엑스포를 칭하는 단어. 만국박람회의 줄임말이다. 반바쿠 세대는 엑스포를 통해 꿈을 키운 청소년층을 말한다. 

기업의 시대를 맞은 엑스포, 부산을 빛낼 주역은?

상하이 엑스포 한국기업관

2010년 상하이 엑스포의 한국기업관

20세기 후반, 엑스포는 특정 인물보단 국가와 기업이 주도하는 형태로 진화했다. 21세기에 접어들며 엑스포 참가국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 인류가 직면한 도전과 과제에 천착했고, 초국경 사업영역을 가진 기업들은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가치 실현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현대자동차그룹 등 12개 대한민국 기업은 지난 2010년 상하이엑스포에서 일본·중국 기업과 함께 대규모 전시관을 개설했다. 이는 엑스포 사상 첫 기업연합전시관으로, 현대차그룹이 전시 구성을 주도했다. 


2030 부산세계박람회가 개최되면 참가국, 국제기구, 지방정부, 기업이 50개 안팎의 독립 전시관을 짓게 된다. 개최국 한국기업의 혁신 역량을 세계인에게 전할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기후변화, 빈부 격차, 초연결사회, 플랫폼 중심 무한경쟁 등이 논의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부산 엑스포 예상도

참고로 오늘날 엑스포는 전시물과 전시기법, 건축양식에서 창의적 정보통신기술(ICT)에 기반을 둔 현대성으로 치닫고 있다. 물품 전시보다 디지털 미디어를 통한 재해석, 인식의 확장, 공유·상호작용형 유비쿼터스 전시가 주류를 이룬다. 2030년 부산 엑스포도 메타버스를 활용한 시공간 확장을 계획 중이다. 현실 세계처럼 사회·경제·문화·기업 활동이 이뤄지는 3차원 가상 세계 기술을 활용해 온∙오프라인 박람회장을 연계하는 것이다. 2012년 여수 엑스포에서 선보인 무정형 가상공간 디지털갤러리 같은 최첨단 전시기법을 통해 자연과의 지속가능한 삶, 인류를 위한 기술, 돌봄과 나눔의 장을 펼치게 된다. 

부산 전경

또한 부산 엑스포에선 수소 기반 미래형 모빌리티, 나노테크놀로지, 첨단소재, 인공지능, 확장현실(XR), 사물인터넷, 퀀텀 컴퓨팅 등 미래산업이 주요 화두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과도한 디지털미디어 집중화 전시가 ‘디지털 피로감’을 낳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긴 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우리는 좋은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글. 오룡(칼럼니스트)

언론인 출신 작가, 번역·집필가로 인문학·문화·역사 분야 글을 쓰고 있다. 인류문명의 쇼케이스가 돼온 엑스포 역사에 매료돼 온갖 산물의 미시사를 탐구하고 정리했다. 서강대와 동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한겨레신문 기자, 아시아기자협회 사무총장, 국제평화재단 사무국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 <상상력의 전시장 엑스포>(201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