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0 기아
세계 각지에서 전기차의 성장세가 두드러지고 있는 요즘, 글로벌 시장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모델은 기아 EV9일 것이다. 2022 유럽 올해의 차, 2023 북미 올해의 SUV 수상에 빛나는 기아의 첫 전용 전기차 EV6에 이은 2번째 모델이자, 기아 전동화 라인업의 플래그십 역할을 맡은 3열 대형 전기 SUV에 대한 관심은 뜨거울 수밖에 없다. 현재 자동차업계를 관통하는 ‘전동화’와 ‘SUV’라는 2개의 키워드를 두루 겸비한 까닭이다.
EV9 시승을 준비하면서 현대자동차그룹의 전기차 개발 기술이 집약된 최신 SUV는 얼마나 즐겁고 놀라운 경험을 선사할 수 있을지 내심 기대가 컸다. 기아 전동화 모델 중 최대 용량인 99.8kWh 배터리, 최적의 공력 성능을 고려해 디자인한 21인치 휠과 눈에 보이지 않는 언더커버까지 세심하게 다듬은 EV9은 얼마나 먼 거리를 달릴 수 있을까. 앞뒤에 모터를 장착한 4륜구동 시스템에 험로 주파용 터레인 모드까지 곁들인 EV9의 잠재력은 어느 정도인지 살펴봤다.
EV9의 첫 평가 무대는 서울에서 약 100km 떨어진 강원도의 굽이진 산길. 강원도로 향하는 고속도로에 오르기 위해 올림픽대로를 타고 서울을 빠져나갔다. 많은 통행량과 노후한 도로 사정으로 인해 노면이 그리 좋지 않은 올림픽대로 위에서 EV9은 푸근한 승차감으로 첫인사를 건넸다. 요철과 굴곡진 노면을 지날 때면 차체가 흔들릴 때 발생하는 충격을 최대한 걸러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다. 특히 뒷바퀴 부근에서 부드러운 승차감을 만들기 위한 인상이 역력하다.
이는 21인치 휠을 탑재한 EV9에 함께 적용되는 후륜 셀프 레벨라이저의 효과다. EV9의 셀프 레벨라이저는 기본형 댐퍼보다 길고 두꺼우며 진동 및 충격을 흡수하는 능력이 더 뛰어나다. 아울러 3열까지 사람이 탑승하거나 트렁크에 많은 짐을 싣는 경우에도 댐핑 압력을 스스로 조절해 차체가 처지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주행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 같은 노력 덕분에 3열 탑승자가 느낄 수 있는 노면 충격은 대부분 완화된다. 다른 3열 SUV에서 느끼기 어려운 편안함이다. 휠베이스가 긴 만큼 앞뒤 바퀴에 충격이 가해지는 데 시간 차가 생기기 때문에 2열 시트에서도 아늑한 승차감을 만끽할 수 있다.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 쉽게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게다가 앞뒤 바퀴 사이 하부에 장착된 고전압 배터리 덕분에 무게 중심도 낮아져서 이 같은 효과가 극대화된다. 이전까지 경험한 다른 전기차들이 대체로 탄탄한 느낌의 하체 세팅을 보여준 것과 비교하면 EV9은 놀랍도록 부드러운 감각이다. 3,100mm의 긴 휠베이스 위로 3열까지 갖춘 SUV라는 특성에 맞춰 세팅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에코 모드로 달리며 배터리 전력을 관리하다가 서울을 벗어나면서 노멀 모드로 바꾸자 출력을 제한하던 빗장이 풀렸다. 앞뒤 모터가 만들어내는 합산 출력 283kW(약 385마력)와 700Nm(약 71.4kgf·m)의 최대 토크는 전장 5,010mm, 공차중량 2,585kg(4WD, 21인치, 6인승, 부스트 사양을 추가한 시승차 기준)에 달하는 무겁고 커다란 덩치를 힘차게 밀어낸다. 고속으로 오를수록 차체가 노면과 붙어 달리는 감각이 한결 명료해진다. 발밑에서 자잘한 진동만 오를 뿐 여전히 노면 피드백을 매끈하게 넘기면서 무게를 이용해 바퀴를 꾹꾹 누르며 달리는 느낌이다.
실내 정숙성도 수준급이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진동과 소음을 줄이기 위해 흡음재를 추가한 분리형 카페트와 흡음 타이어를 장착하고, 모터 및 인버터, 감속기로 이뤄진 PE(Power Electric) 시스템의 소음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 모인 결과다. 높은 차체와 각진 형상 때문에 커질 수 있는 풍절음을 줄이기 위해 이중접합 차음 글라스도 적용했다.
널찍한 실내, 깔끔한 구성의 인테리어 디자인, 몸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시트, 외부 소음을 잘 차단해주는 NVH 대책 덕분에 목적지로 이동하는 시간이 세상 아늑하고 풍요로웠다. 측면 지지대가 살짝 올라온 시트의 탄탄한 쿠션감과 메시 타입 헤드레스트에 기댄 뒤통수에서 느끼는 푹신함이 기분 좋은 착좌감을 선사한다. EV9의 운전석에서는 높은 시트 포지션과 깔끔한 수평형 구조의 대시보드 덕분에 쾌적한 시야와 탁 트인 전망을 누릴 수 있다. 출발 후 30분이 지난 시점부터는 운전석에 적용된 에르고 모션 시스템이 스스로 쿠션을 작동해 허리를 꾹꾹 눌러주기도 한다. 오랜 시간 고정된 자세로 운전할 때 허리 근육에 무리가 생길 수도 있을 운전자를 위한 섬세한 배려다. 기능을 켜고 끄는 것은 물론, 작동 시간도 조절할 수 있으니 운전자의 취향대로 선택하면 될 일이다.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한 뒤 곧바로 산길을 오르내릴 준비를 했다. 넓고 깨끗한 도로와 한적한 통행량 덕분에 이름난 드라이빙 코스다. 곧게 뻗은 길에서 강력한 힘과 푸근한 승차감으로 여유롭게 달린 EV9이 굽이진 길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혹여 너무 크고 무거운 체구와 부드러운 하체가 역동적인 주행에 방해가 되진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도로에 나섰다.
본격적인 주행을 시작하기 전 운전대 하단의 버튼을 눌러 주행 모드부터 다시 세팅했다. EV9의 주행 모드는 에코, 노멀, 스포츠, 그리고 모터 반응과 스티어링 휠 감도를 수동으로 조작하는 마이 모드가 있다. 오토(자동), 스노(눈길), 머드(진흙길), 샌드(모래길)로 이뤄진 터레인 모드는 2차 목적지에서 경험하기로 하고, 와인딩 주행에 맞게 스포츠 모드로 바꿨다. 그러자 운전대가 한층 무거워지고 시트 측면 지지대가 몸을 더욱 단단히 조인다.
속도를 높여 코너 하나하나를 빠져나가면서 고속도로에서 보여줬던 나긋나긋한 인상은 희미해졌다. 특히 바깥쪽 바퀴를 묵직하게 누르며 코너 안쪽으로 파고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EV9은 전용 전기차의 특성을 살린 짧은 오버행과 빠릿빠릿한 반응 덕분에 회두성이 뛰어나다. 코너링에 불리한 긴 차체라는 약점도 강한 출력과 준수한 핸들링 성능으로 손쉽게 보완한다. 앞뒤 서스펜션에 알루미늄 소재의 로어 암과 너클을 적용해 현가하질량(서스펜션 스프링 아래쪽의 질량)을 줄인 효과도 있다. 일반적으로 현가하질량을 줄이면 핸들링 성능과 승차감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 물론 큰 덩치와 무게 때문에 한계 영역이 그리 높진 않지만, 운전자가 머릿속에 그린 라인을 오차없이 따라가는 경쾌한 몸놀림을 보여준다.
내리막길에서는 전기차의 특성을 살려 회생제동을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코너 진입 전 왼쪽 시프트 패들을 당겨 회생제동 단계를 최대로 올려 감속한 뒤 다시 가속할 때 오른쪽 패들을 당겨서 회생제동 단계를 낮추는 식이다. 운전의 재미도 높이고 버려지는 에너지까지 쏠쏠하게 챙기면서 브레이크 시스템의 수명까지 늘리는 1석3조의 방법이다. 특히 EV9은 ABS가 개입할 정도로 빠르게 감속하는 상황에서도 회생제동을 유지할 만큼 에너지 회수에 진심이다.
물론 크고 무거운 대형 전기 SUV라는 조건상 코너를 너무 빠르게 진입할 때는 코너 바깥으로 차가 밀려나려는 언더스티어 현상도 종종 일어났다. 하지만 그럴 때 보이지 않게 도움을 주는 모터 제어 기술도 적용됐다. 코너 안쪽 바퀴에 제동력을 가하는 동시에 이와 동일한 양의 구동력을 바깥쪽 바퀴에 보내 궤적을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게끔 도와주는 다이내믹 토크 벡터링(E-DTVC)이다. 운전자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작동하기 때문에 한결 편리하게 주행할 수 있다.
산길을 달리면서 의외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도로를 인식해 좌우 차선을 벗어나지 않고 차로 가운데로 달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차로 이탈방지 보조 및 차로 유지 보조 기능이다. 특히 EV9에는 기존의 토크 제어 방식을 조향각 제어 방식으로 바꾸며 제어 성능이 좋아진 ‘차로 유지 보조 2’가 적용된다. 급격한 코너만 만나지 않는다면, 어느 코너든 차로 유지 보조 2 기능이 작동해 주행 편의성을 높인다. 완만하게 굽은 국도나 고속도로에서는 한결 안정적으로 길을 따라 달린다. 산길을 달릴 때 운전대를 잡은 손에서 힘을 뺀 채 스스로 조향하는 차에 앉아 있는 경험은 꽤 신선했다.
EV9의 가장 큰 특징은 3열 시트까지 소화하는 널찍한 실내 공간일 것이다. 시승차는 2열 스위블 시트가 탑재된 사양이라 시트를 뒤로 돌리고 3열 시트를 접으면 발을 뻗고 편안히 쉴 만한 공간이 완성된다. 활짝 열린 테일게이트와 창문을 넘어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어오니 달콤한 휴식을 누리기에 제격이었다. 이처럼 EV9은 차로 떠나는 피크닉이나 캠핑까지 여유롭게 소화하는 유용한 공간을 갖췄다.
잠시나마 망중한을 즐기며 다음 목적지를 떠올렸다. 평소에는 메마른 황무지와도 같은 곳이지만, 지난 주말 사이에 많은 비가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마도 여기저기에 물웅덩이가 많이 생기고, 흙바닥은 진흙탕처럼 변해 있을 게 분명했다. 과연 그런 상황에서도 EV9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미끄러운 흙길에서 안정적으로 접지력을 확보할 수 있는 4륜구동 시스템과 트랙션 모드를 믿어보기로 했다. EV9의 믿음직스럽고 강인해 보이는 외모도 자신감을 심어주는 데 한몫했다.
본격적으로 험로에 들어서기 전, 바싹 마른 흙길에서 EV9의 험로 주행 능력을 간단히 시험해 보기로 했다. 곳곳에 땅이 움푹 꺼지고 돌멩이와 흙무더기가 가득했지만, 노면에서 차체 바닥까지의 높이가 어느 정도 되는 SUV라면 이 정도쯤 지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EV9은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시야 덕분에 험로에서 주행 방향을 잡기도 수월하다.
인상적인 것은 울퉁불퉁한 길에서 EV9이 보여주는 승차감이다. 포장도로에서 나긋나긋한 인상을 전달했던 부드러운 하체 세팅 덕분에 거친 노면에서도 편안하게 달릴 수 있었다. SUV라는 태생에 맞게 온로드와 오프로드를 모두 포기하지 않고 편안한 승차감을 제공하려는 세팅에 집중한 결과다.
그중 위아래로 늘어난 스프링이 다시 줄어들 때 충격을 줄여주는 댐퍼의 활약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거친 노면이 앞바퀴에 가하는 충격을 더욱 잘 걸러낼 수 있도록 설계한 전륜 듀얼 로어 암 구조와 더불어 후륜 크로스멤버 체결 부위에 적용한 하이드로 부시의 효과도 잘 드러났다. 후륜 하이드로 부시는 둔덕을 통과하거나 길이 울퉁불퉁한 곳에서 올라오는 진동을 줄여주는 효과를 제공한다. 이 밖에도 EV9에는 차체 구석구석 보강 구조를 적용해 강성을 강화하고 평균 강도를 높이는 노력이 숨어 있다. 견고해 보이는 EV9의 인상이 험로 주행에서 더욱 극적인 모습으로 이어졌다.
EV9 4륜구동 모델에 탑재된 터레인 모드도 험로 주행을 도와주는 숨은 공신이다. 4가지 주행 모드(오토, 스노, 머드, 샌드)에 맞춰 전자식 차체자세제어 장치와 앞뒤 모터를 제어해 각기 다른 노면 상황에 알맞게 구동력을 활용하는 똑똑한 시스템이다. 노면을 구성하는 입자의 형태와 특성에 따라 타이어의 접지력과 직결되는 마찰력이 달라지기 때문에 모드별로 제어를 달리한다. 오토 모드의 경우 인공지능 시스템이 실시간으로 주행 노면을 파악해 가장 알맞은 구동력을 제공한다. 아울러 터레인 모드를 사용할 때는 주행 안정성을 위해 회생제동을 1단계까지만 쓸 수 있고, 경사로 저속 주행 기능이 활성화된다. 이처럼 EV9은 터레인 모드 덕분에 여느 전기차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길도 막힘없이 통과할 수 있다.
고속도로와 굽은 산길, 거친 험로까지 모두 주행한 뒤 EV9에 대한 인상은 처음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감각의 대형 전기 SUV’라는 첫인상이 ‘언제 어디서든 편안한 여정을 약속하는 첨단 전동화 모빌리티’로 바뀌어 있었다. 참고로 이번 시승으로 EV9과 함께 달린 거리는 400km였고, 트립 컴퓨터가 기록한 전비는 5.1km/kWh였다. EV9 시승차의 정부 공인 복합 전비(3.9km/kWh)보다 월등히 높은 수치다. 다양한 상황에서 주행했지만, 치밀하게 다듬은 공력 성능과 눈에 띄지 않게 열심히 일한 회생제동 시스템 덕분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계산해보면 99.8kWh 용량의 배터리를 모두 소진할 때 509km를 주행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온다. ‘500’이라는 숫자가 전하는 의미는 남다르다. 충전 걱정 없이 450km쯤은 편하게 달릴 수 있는 안락한 대형 전기 SUV는 전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EV9의 등장으로 전기차 라이프의 새로운 영역이 열린 셈이다.
사진. 최대일, 김범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