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을 달리는 현대 랠리카의 모습 설원을 달리는 현대 랠리카의 모습

2023.03.30 현대 모터스포츠팀 분량5분

WRC 랠리1 경주차의 모든 것

WRC가 랠리1 경주차를 도입한 지 어느덧 1년이 넘었다. 한 시즌을 온전히 보낸 랠리1의 주요 특징을 상세히 살펴봤다.

하이브리드 구동계를 장착한 새로운 현대 랠리카의 모습

지난 2022년, WRC는 25년간 유지해 온 월드 랠리카(World Rally Car) 시대를 마감하고 랠리1(Rally1) 경주차의 시대를 시작했다. 환경 위기와 지속가능성이라는 문제에 주목해 경주차의 구동계를 하이브리드화 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참가팀들의 비용 절감을 위한 공력 디자인 단순화, 센터 디퍼렌셜 폐지 등 다양한 규정을 다듬었다. 500마력이 넘는 최고출력과 강관 스페이스 프레임이 1980년대 그룹B 시절의 경주차를 떠올리게 하지만, 랠리1 경주차는 하이브리드 구동계와 탄소 중립 연료 등 시대적 요구도 충실히 담은 새 시대의 랠리카라고 할 수 있다. 

전기차가 아닌 하이브리드인 이유

몬테카를로 랠리를 앞두고 대기 중인 현대 랠리카의 모습

2023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몬테카를로 랠리에 현대 월드랠리팀의 새로운 랠리카가 등장했다

환경 문제가 어느때 보다 심각해지면서 전세계 배출가스 규제 또한 빠르게 강화되고 있다. 이제 내연기관 퇴출은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전기차나 수소 연료전지차 같은 무공해차로의 전환이 눈앞에 다가왔다. 모터스포츠 역시 이런 흐름을 역행할 수 없다. 단시간에 많은 연료를 태워 고출력을 쏟아내는 레이싱카는 환경운동가들의 집중적인 공격대상이 되어왔다. 트렌드에 민감한 기업들 역시 화석연료를 태우는 모터스포츠에 더 이상 돈(광고)을 쓰고 싶어하지 않는다. 


F1은 2009년에 회생제동장치 KERS(Kinetic Energy Recovery System)를 도입하고 2014년에는 V6 1.6L 엔진과 모터, 에너지 회수장치를 결합한 하이브리드로 완전 전환했다. 르망으로 대표되는 내구 레이스(WEC) 역시 2000년대 중반에 바이오 에탄올 같은 대체연료를 시험했고, 2009년에는 푸조가 에너지 회수장치를 도입해 하이브리드화의 물꼬를 텄다. 

수리를 위해 피드에 들어와 있는 현대 랠리카의 모습

새로운 규정에 따라 랠리1 경주차는 100kW 모터와 배터리를 추가한 하이브리드 구동계를 사용한다

이보다는 늦었지만 WRC 역시 지난해부터 월드 랠리카를 대신하는 랠리 1 규정을 도입했다. 기존 엔진에 100kW 모터와 배터리를 추가한 하이브리드 랠리카다. 환경을 위한다면 아예 전기차로 바꾸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출력을 한계까지 쥐어짜다 보면 배터리는 금세 바닥난다. 그렇다고 배터리를 많이 실으면 차는 너무 무겁고 비싸질 뿐 아니라 충전도 오래 걸린다. 모터스포츠 씬에서 현재 전기차가 가진 한계다. 그래서 아직은 ETCR(전기 투어링카)이나 랠리크로스, 힐크라임같은 일부 단거리 경기에서만 전기차를 도입하고 있다. 

동일하게 제공되는 하이브리드 시스템

위장 패턴을 입은 현대의 새로운 랠리카가 오프로드에서 테스트를 진행 중인 모습

위장 패턴을 뒤집어 쓴 i20 N 랠리1 경주차가 성능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다

F1과 내구 레이싱의 전례에서 알 수 있듯, 하이브리드는 특유의 복잡성 때문에 개발비 폭등을 불러온다. WRC는 이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하이브리드 패키지를 일괄 공급하기로 했다. 동력원과 발전기를 겸하는 100kW(134마력)의 MGU(Motor Generator Unit)와 3.9kWh 용량의 750V 배터리, 그리고 인버터 컨트롤러를 긴 직사각형의 카본 케이스에 수납하여 각 팀에 제공한다. 87kg짜리 하이브리드 유닛은 뒷좌석 부근에 가로로 얹혀 프로펠러 샤프트를 돌린다. 개발과 생산은 독일 콤팩트다이나믹스(Compact Dynamics)가 맡았다. 

랠리1 경주차는 380마력을 내는 기존 1.6L 터보 엔진에 100마력이 넘는 모터를 추가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500마력이 넘는 출력과 500Nm의 토크를 뿜어낼 수 있다. 하지만 모터가 언제 얼마큼 힘을 보탤 지는 모드 선택에 따라 다르다. 모드는 총 3가지를 준비할 수 있으며, 스테이지를 달리는 도중에는 바꿀 수 없다. 

하이브리드 구동계를 설명하는 그래픽 이미지

MGU, 배터리, 인버터 컨트롤러 등이 합쳐진 하이브리드 패키지는 경주차 뒷좌석에 장착돼 뒷바퀴에 동력을 전달한다

전력공급을 설명하는 그래픽 이미지

외부 전력 공급은 규정에 맞춰 서비스 파크에서만 진행할 수 있다

서비스 파크 외에 몇몇 지정된 지점(HEV 존)에서는 반드시 엔진을 끄고 모터로만 움직여야 한다. 지난해 몬테카를로 랠리 기준 HEV 구간은 3.65km로 전체 구간의 0.3%에 불과했다. 주행거리로 보면 요식행위에 가깝지만 배터리 용량을 생각하면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이다. 3.9kWh의 배터리는 완충 상태에서도 EV 모드로 20km 주행이 가능할 뿐이다. 니로 하이브리드 대비 배터리 용량 2배(1.56kWh), 모터 출력은 3배(32kW vs 100kW)다. 외부 충전이 가능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라서 약 30분이면 완충이 가능하며 달리는 도중에는 액셀 오프나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회생제동이 작동하여 배터리가 충전된다. 

지속가능한 100% 합성 연료

새로운 규정에 따라 변경된 랠리카 연료의 모습

랠리1은 하이브리드 구동계 도입 뿐만 아니라 새로운 연료를 사용하도록 규정이 변화했다. 사진 : WRC (https://www.wrc.com)

엔진은 월드 랠리카의 1.6L 터보 규정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하지만 연료가 달라졌다. 새 규정에 따라 제작한 엔진은 땅 속의 원유를 시추하는 화석 연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탄소중립 원료를 사용해 탄소 배출량을 최소한으로 줄인다. FIA(Federation Internationale de l'Automobile, 국제 자동차 연맹)가 주관하는 월드 챔피언십 중 최초 도입이다. 

P1 레이싱 퓨얼에서 담당하는 새 연료는 식물 등에서 얻는 바이오 연료에 e-퓨얼(수소, 이산화탄소를 합성해 만든다)을 섞어 제조한다. 자동차 시장이 빠르게 전기차로 전환된다고 해도 수많은 내연기관 자동차가 금세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탄소 중립 연료가 주목받고 있는 이유다. 다만 아직은 연소 특성 등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며, 가격도 비싸 보급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외모는 양산차, 하지만 내용물은?

새로운 공력파츠로 외모를 바꾼 현대 랠리카의 모습

랠리1은 베이스가 된 양산차와 외모만 비슷할 뿐, 내용은 철저히 랠리에 초점을 맞춘 경주차다

WRC는 월드 랠리카 시절부터 이미 랠리 전용 경주차였다. 상대적으로 양산차에 가까웠던 그룹A와 달리 구동계와 엔진, 그리고 공력 파츠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개조가 가능했다. 그래도 뼈대(섀시)만큼은 양산차에서 가져왔고, 외모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반면 랠리1은 섀시마저 스페이스 프레임을 사용한다. 겉보기만 양산차일 뿐 내용물은 완전히 랠리 전용차인 셈이다. 

스페이스 프레임 구조를 설명하는 그래픽 이미지

월드 랠리카와 달리 랠리1은 스페이스 프레임을 사용하여 차체 강성을 끌어올렸다

강관으로 제작되는 스페이스 프레임은 하이브리드 패키지를 추가한 경주차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구조는 WRC에서 1980년대 그룹B 이후 오랜만이다. 미국의 인기 투어링카 경기인 나스카(NASCAR) 역시 이런 방식이다. 구성과 형태가 제각각인 양산차 섀시에 비해 효과적으로 고강성 세이프티 셀을 완성할 수 있다. 


FIA의 테스트에 따르면 랠리1 섀시는 구형에 비해 정면에서 70%, 측면에서 51%, 지붕에서 115% 더 많은 충돌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다. 그렇다고 랠리1에서 양산차 부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앞 유리와 보닛, 테일 게이트, 도어 주변 등은 여전히 양산차의 부품을 사용한다. 하이브리드 패키지 추가를 고려해 최저 무게도 늘어났다. 기존 1,190kg에서 70kg 늘어난 1,260kg이다. 

비용 증가를 막아라

현대 랠리카의 전면 모습

규정 변화로 인해 앞 범퍼의 에어 스플리터가 삭제됐다

엔진과 모터라는 별개의 동력원을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하는 하이브리드는 필연적으로 비용 증가를 불러온다. 이는 기존 제조사 팀에 부담이 될 뿐 아니라 신규 팀의 진입을 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따라서 FIA는 앞서 설명한 하이브리드 패키지 일괄 공급 등 비용 절감 노력에도 공을 들였다. 

현대 랠리카의 후측면 모습

리어 디퓨저 역시 사라지고 하이브리드 유닛 냉각을 위한 에어 덕트가 추가됐다

에어로파츠 단순화 역시 비용 증가를 막기 위한 조치다. 이 조치는 경주차 외형에도 약간의 변화를 가져왔다. 새 규정에 따라 앞 범퍼 둘레의 복잡한 에어 스플리터와 리어 디퓨저가 사라졌다. 월드 랠리카에 비해 줄어든 다운포스를 보강하기 위해 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노력 중이다. 추가된 부분도 있다. 바로 하이브리드 시스템 냉각을 위한 별도의 에어 덕트다. 현대 월드랠리팀 i20 N 랠리1의 경우, 측면 창 뒤쪽의 납작한 흡기 덕트를 통해 공기를 흡입하고, 라디에이터를 식힌 공기는 뒷범퍼 양쪽에 마련된 배출구를 통해 방출한다. 


아울러 6단 변속기가 5단으로 줄고 패들 시프터도 금지됐다. 또한 센터 디퍼렌셜을 없애 앞뒤 구동력 배분율이 50:50로 고정됐다. 이외에도 서스펜션 구조 단순화, 휠 트래블(위아래로 움직이는 거리) 축소 등 성능과 비용에 영향을 주는 여러 부분이 간소화됐다. 

고전압 배터리에 따른 안전조치

랠리카 수리가 진행 중인 현대 모터스포츠팀 피트의 전경

고전압 배터리를 사용하는 만큼 경주차를 정비하는 모든 이는 안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750V 고전압 배터리는 감전의 위험성이 있다. 하지만 WRC는 차를 만지는 팀 크루는 물론이고 경기 도중에는 드라이버 및 코 드라이버가 직접 차를 고쳐야 한다. 그래서 1,000V까지 막아주는 절연 장갑을 반드시 차에 구비하도록 했다. 아울러 FIA는 관중들에 대한 캠페인도 준비했다. WRC는 경기 도중 도랑에 빠지거나 전복되었을 때 주변 관중들이 경주차를 밀고 끄는 일이 흔하기 때문. 이제는 차에 접근하기 전에 앞창과 옆창에 하이브리드 작동을 표시하는 알림등을 확인해야 한다. 초록 불일 때는 만져도 안전하다는 뜻이며, 빨간 불이거나 아예 불이 꺼져 있을 때는 손을 대면 안된다. 

설원을 달리는 현대 랠리카의 모습

하이브리드 시스템에 이상이 생기면 엔진이 구동되어도 움직여선 안된다는 규정이 생겼다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드라이버가 현장에서 직접 고치기 어려운데다 안전을 위해 규칙을 보수적으로 설정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스웨덴에서 우승을 다투던 오트 타낙(Ott Tänak)과 엘핀 에반스(Elfyn Evans)는 강제로 리타이어해야 했다. 엔진이 살아있어 차를 움직일 수 있더라도 하이브리드 경고등이 뜨거나 활성 표시등이 들어오지 않았을 때는 더 이상 달리면 안된다는 규정 때문이다. 만약의 사태를 위한 예방책이지만 억울한 피해자가 나올 가능성도 크다. 참고로 FIA는 하이브리드 트러블이 경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리타이어 페널티를 10분에서 2분으로 줄였다. 



글. 이수진 (자동차 평론가)

1991년 마니아를 위한 국산 자동차 잡지 <카비전> 탄생에 잔뜩 달아올라 열심히 편지를 보냈다가 덜컥 인연이 닿아 자동차 기자를 시작했다.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편집장과 편집 위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자동차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전기차와 커넥티드카, 자율주행 기술 같은 최신 트렌드를 열심히 소개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름 냄새 풍기는 내연기관 엔진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자동차 덕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