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13 현대 모터스포츠팀
몬테카를로에서 WRC 2023 시즌의 개막전을 치른 도전자들은 2월 2째 주, 스웨덴 북동부의 우메오(Umeå)로 모여들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눈 덮인 스테이지를 질주하는 시즌 유일의 스노 랠리에 도전하기 위해서다. 스웨덴 랠리가 지난해부터 중남부 지역을 떠나 우메오로 본거지를 옮긴 이유는 기상이변 때문이다. 기온이 오르면서 스테이지에 눈이 녹아 지난 몇 년간 파행 운영을 피할 수 없던 것. 스웨덴에서 주로 사용하는 스터드 타이어(금속 스파이크를 두른 눈/얼음 전용 타이어)는 일반 노면에선 빠르게 손상된다. 이로 인해 2020년에는 3일간 고작 5개 스테이지를 반복하는 169.74km 구간(1~10SS)에서 경기를 치러야 했다.
수도 스톡홀름(Stockholm)에서 북쪽으로 600km 떨어져 있는 우메오는 스웨덴 북부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대학 도시로 유명하다. 북극에 가까워 눈이 녹을 걱정이 없고, 코너가 복잡하지 않아 높은 속도를 낼 수 있다. 지난해 우승자인 칼리 로반페라(Kalle Rovanperä)가 기록했던 평균시속 121.52km/h는 스웨덴 랠리 역사상 2번째로 빠른 기록이었다. 반면 정찰을 마친 드라이버들은 지나치게 직선 위주라 흥미가 떨어진다는 반응을 내놓기도 했다.
랠리1에서 경쟁 중인 현대 월드랠리팀, 도요타, M-스포트 포드는 개막전과 다른 드라이버 라인업을 준비했다. 우선 현대팀은 티에리 누빌(Thierry Neuville)과 에사페카 라피(Esapekka Lappi), 크레이그 브린(Craig Breen)을 엔트리했다. 개막전 초반 현대팀이 고전하는 가운데서도 누빌은 치열하게 선두권을 따라붙어 결국 3위로 포디엄 피니시를 달성했다. 참고로 누빌은 1998년 스웨덴에서 우승 경험이 있다. 하지만 독감에 걸리는 바람에 사전 테스트 일정을 포기했고, 경기 시작 직전까지도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했다.
올해 현대팀의 새식구가 된 라피는 스웨덴 바로 옆 나라인 핀란드 출신답게 눈길에서 강한 면모를 보여왔다. 지난해에는 3위에 올랐고, 2019년에는 2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아직 현대팀의 경주차(i20 N 랠리1)에 대한 적응이 충분치 않은 상황이다. 자신감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이번 경기 결과가 중요하다. 현대팀 역시 이런 라피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스웨덴 경기 일주일 전 핀란드에서 열린 쿠오피오 랠리(Kuopio-ralli)에 출전시켰다. 물론 세팅 데이터 확보도 중요한 목적이었다.
테스트 일수가 30일에서 21일로 줄어든 만큼 상위 팀들은 소규모 랠리 출전으로 테스트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현대팀의 라피와 도요타의 타카모토 가츠타(Takamoto Katsuta)는 핀란드 쿠오피오 랠리에 출전했고, M-스포트 포드의 오트 타낙(Ott Tänak)은 에스토니아에서 열린 오테파 탈브 랠리(Otepää Talveralli)에 출전해 데이터 수집과 적응 훈련에 나섰다.
현대팀의 3번째 차는 아일랜드 출신인 크레이그 브린이 맡았다. M-스포트 포드로 이적했다가 1년 만에 복귀한 브린의 시즌 첫 출격이다. 신차에 탄지 얼마 되지 않았고, 코드라이버마저 지난 시즌 막판에 제임스 풀턴(James Fulton)으로 교체하는 등 아직은 많은 것이 낯선 상황이다. 그래도 2018년 스웨덴에서 2위를 기록했고, 현대팀과 3개의 시즌(2019~2021)을 함께한 경험이 있으니 빠르게 적응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도요타는 이번에도 4대의 야리스를 준비했다. 세바스티앙 오지에(Sébastien Ogier)가 빠지고 로반페라, 엘핀 에반스(Elfyn Evans), 가츠타가 팀 득점을 책임진다. 지난해 챔피언이자 스웨덴 우승자인 로반페라와 2020년 스웨덴 우승자인 에반스까지, 실로 강력한 진영이다. 다만 에반스는 지난해 벨기에 이후로 포디엄에 오르지 못하는 등 부진이 이어지고 있다.
도요타는 이번에 처음으로 야리스 랠리카를 외부 드라이버에게 임대했다. 지금까지 M-스포트 포드를 임대했던 로렌초 베르텔리(Lorenzo Bertelli)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베르텔리는 프라다 그룹 후계자이자 재벌 2세로 지난 2010년 랠리계에 데뷔했으며, 2014년 이탈리아에서는 WRC2 클래스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M-스포트 포드는 오트 타낙과 피에르-루이 루베(Pierre-Louis Loubet) 2명을 출전 시켰다. 타낙은 지금까지 스웨덴에서 3번이나 포디엄에 오른 전적이 있다. 반면 루베는 스노 랠리 경험이 많지 않다. 이번 경기는 서포트 시리즈인 WRC3의 개막전이라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2021년까지 WRC2의 프라이빗 버전이었다가 하위 클래스로 자리를 잡은 WRC3는 예전 JWRC가 담당했던 드라이버 육성 임무를 이어받았다. 그러면서도 상위 클래스 적응을 고려해 4WD 랠리카(기존에는 앞바퀴 굴림)를 사용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현재는 포드 피에스타뿐이지만 르노에서도 여기에 투입할 신차를 준비 중이다.
2월 9일 목요일 저녁 7시, 우메오는 완전히 어둠에 잠겼지만 스웨덴 랠리의 시작을 알리는 SS1(Umeå Sprint) 무대는 랠리카와 관중들의 열기로 들썩거렸다. 도심 인근에 마련된 특설 스테이지 치고는 짧지 않은 5.16km의 코스는 단단하게 얼어붙은 얼음벽이 참가자들을 위협했다. 실제로 누빌을 비롯해 타낙, 라피, 에반스 등이 벽과 부딪쳐 공력 파츠가 파손됐다. 로반페라가 선두에 나섰고 타낙, 에반스, 라피, 누빌, 가츠타, 브린, 루베 순으로 첫날을 시작했다.
2월 10일 금요일은 30분의 점심 서비스를 끼고 3개 스테이지를 오전과 오후에 반복한 후, 전날 달렸던 우메오 스프린트에서 하루를 마감했다. SS2~SS8의 7개 스테이지 합계 106.76km 구간에서 경기를 치렀다. 금요일 중에서 가장 긴 25.81km의 보츠마르크(Botsmark, SS4/SS7)는 완전히 새로운 스테이지로, 두번째 달릴 때는 어둠 속에서 진행됐다.
금요일 오프닝 스테이지(SS2)를 잡은 것은 현대팀의 브린이었다. 브린은 출발 순서가 늦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랠리카 적응 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페이스를 보이며 단숨에 종합 2위로 올라섰다. 라피 역시 좋은 페이스로 종합 3위가 되었다. SS3와 SS4는 로반페라와 가츠타가 나누어 가졌다. 오후에 브린이 다시 2연속 톱타임(SS5, SS6)을 잡아내며 타낙을 밀어내고 종합 선두로 부상했다. 오전 페이스가 좋았던 가츠타는 SS5에서 눈벽을 긁으며 전복사고를 일으켜 리타이어했다.
금요일은 브린이 종합 선두로 마무리했다. 경기가 끝난 후 파크 페르메(Parc ferme, 경주차 보관 구역)에서 엔진을 시동(EV 모드로 다녀야 한다)했다는 이유로 청문회가 소집되었지만 가벼운 견책만 받아 선두 자리는 유지되었다. 타낙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SS7을 잡은 타낙은 10.7초까지 벌어졌던 시차를 2.6초까지 줄이며 압박했다. M-스포트에서 현대팀으로 돌아온 브린과 현대팀에서 M-스포트 포드로 이적한 타낙이 치열한 선두 싸움을 이어간 것이다. 라피는 타낙과 8.6초 차이로 종합 3위였다. 에반스, 로반페라, 누빌, 루베, 올리버 솔베르그(Oliver Solberg), 사미 파자리(Sami Pajari), 야리 후투넨(Jari Huttunen)이 4~10위였다. 컨디션이 나아진 누빌은 금요일 내내 언더스티어와 싸웠고, 범퍼도 손상되는 등 어려움이 많았지만 로반페라와 5.7초의 근소한 차이를 유지했다.
2월 11일 토요일 역시 3개 스테이지를 반복한 후 도심 인근 스테이지를 달리는 7개 SS 126.22km 구성이었다. 오프닝 스테이지 노비(Norrby)와 플로다(Floda)는 완전히 새로운 코스다. SS10, SS13인 플로다는 28.25km로 이번 경기 중 가장 길다. 마지막 SS15(우메오)는 첫날의 스프린트 코스 일부를 10.08km로 연장해 만들었다. 타이어 공급자인 피렐리(Pirelli)는 토요일을 승부의 분수령으로 내다봤다. 노면 컨디션이 복합적이라 오후에는 눈이 파여 자갈과 흙바닥이 드러나 타이어 손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었다.
토요일 오프닝에서는 누빌이 톱타임을 기록하며 컨디션 회복을 알렸다. 선두 경쟁은 여전히 혼란 상황으로 브린과 타낙이 5초 남짓한 시차를 유지했다. 오후가 되자 현대팀 진영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우선 SS13에서 라피가 눈더미에 파묻혀 시간을 잃었다. 관중의 도움을 받으며 차를 되돌렸지만 무려 7분을 손해보는 바람에 포디엄에 대한 희망은 사라졌다. 하지만 로반페라가 SS13에서 스핀하며 누빌의 추격을 허용했다.
브린은 왼쪽 앞 타이어 펑크와 하이브리드 시스템 이상으로 타낙의 추월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토요일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타낙이 종합 선두로 올라섰다. 브린이 8.6초 차이로 2위, 3위는 놀랍게도 누빌이었다. 경기 초반 컨디션 난조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실수를 최소화하며 착실하게 페이스를 끌어올렸다. 그 결과 토요일 3개 스테이지(SS9, SS13, SS14)를 잡으며 로반페라를 3.8초 차이로 밀어냈다. 4~6위는 로반페라, 에반스, 루베였고, 그 뒤로는 솔베르그를 필두로 하는 WRC2 세력이 포진했다.
경기 직후 타이어 박리 문제와 스터드 손상에 대한 드라이버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라피와 브린, 타낙 등이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 타이어 공급업체인 피렐리는 눈이 파해쳐지면서 거친 노면이 드러난 데다 팀들이 공기압을 너무 낮게 세팅했고, 속도가 빠른 코스가 원인이라고 항변했다.
2월 12일 일요일은 3개 스테이지만으로 구성됐다. 오프닝 베스터빅(Västervik) 스테이지를 2번 반복해 달린 후에 토요일 마지막 스테이지였던 우메오에서 마지막 승자를 가렸다. 파워 스테이지는 도심 인근에 마련되어 많은 관중이 몰려들었다. 3개 스테이지의 총 길이는 64.03km로 짧았지만, 상위권 경쟁 구도는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웠다. 선두 타낙과 브린의 시차는 8.6초, 누빌과 로반페라는 3.8초에 불과했다. 타이어 슬로 펑처(Slow puncture, 바람이 천천히 빠지는 펑크) 혹은 가벼운 실수만으로도 뒤집힐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일요일 오프닝 스테이지를 잡은 것은 로반페라였다. 타낙은 2위로 브린과의 차이를 11.6초로 벌리면서 우승에 한 걸음 다가섰다. 같은 코스를 다시 달린 SS17에서는 누빌이 톱타임, 브린이 2번째로 들어오며 현대팀이 반격에 나섰다. 이제 타낙과 브린의 시차는 8.5초, 누빌 역시 1.1초 차 턱밑까지 추격했던 로반페라를 7.1초 차이로 밀어내 3위 자리를 굳혔다. 이제 파워 스테이지를 겸하는 최종 SS18만이 남았다. 타이어를 아낀 에사페카 라피(Esapekka Lappi)가 톱타임으로 5점을 챙긴 가운데 에반스, 로반페라, 타낙, 브린이 점수를 나누어 가졌다.
스웨덴 랠리 트로피는 M-스포트 포드의 타낙이 가져갔다. 챔피언이었던 2019년 이후 오랜만에 포인트 선두로 올라섰다. 하지만 현대팀은 2위 브린, 3위 누빌로 더블 포디엄을 달성했다. 아쉽게 우승을 놓친 브린은 신차에 빠르게 적응하며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누빌 역시 초반 부진을 빠르게 극복하며 포디엄의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참고로 누빌은 드라이버즈 포인트 15점을 더해 챔피언십 3위 자리를 유지하는데도 성공했다.
마지막까지 누빌을 추격했던 로반페라는 지난해만큼의 스피드를 보여주지 못하며 4위에 머물렀다. 에반스 역시 5위를 기록하며 도요타팀은 포디엄 등극에 실패했다. 루베는 최종 스테이지에서 차에 연기가 나 1분 가까이 시간을 버렸지만 6위로 겨우 완주했고, 라피는 7위로 경기를 마쳤다. 팀 포인트에서는 현대팀이 39점을 보태 선두인 도요타와의 차이를 14점으로 좁혔다.
WRC2에서는 종합 7위 솔베르그를 선두로 올레크리스티앙 베이비(Ole-Christian Veiby), 파자리, 니콜라이 그리야진(Nikolay Gryazin) 순이었다. 한편, 시즌 개막이었던 WRC3에서는 루페 코르호넨(Roope Korhonen)이 우승을 차지했다. 이제 참가자들은 바다를 건너 3월 16~19일, 시즌 첫 그래블 코스에 도전한다. 코로나 때문에 지난 2년동안 개최가 중단됐던 멕시코 랠리다. 해발 2,700m의 희박한 공기와 거친 자갈길, 무더위가 경주차의 내구성과 드라이버들의 인내심을 시험할 예정이다.
글. 이수진(자동차 평론가)
1991년 마니아를 위한 국산 자동차 잡지 <카비전> 탄생에 잔뜩 달아올라 열심히 편지를 보냈다가 덜컥 인연이 닿아 자동차 기자를 시작했다.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편집장과 편집 위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자동차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전기차와 커넥티드카, 자율주행 기술 같은 최신 트렌드를 열심히 소개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름 냄새 풍기는 내연기관 엔진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자동차 덕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