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 명장면 10개 요약 이미지 엑스포 명장면 10개 요약 이미지

2022.10.28 현대자동차그룹 분량8분

우리가 알아야 할 엑스포 역사 속 10대 명장면

우리가 엑스포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상상력의 전시장 엑스포>의 저자 오룡이 엑스포 역사 속 명장면 10개를 소개한다.

2030 부산엑스포 조감도

부산 북항 일원에 조성될 2030 부산엑스포 예정지 조감도

부산이 2030년 개최를 추진 중인 엑스포는 3세기에 걸친 인류문명의 전시장이자 산업·과학·문화의 교류 마당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산물 대부분이 엑스포를 통해 세상에 소개되고 보급됐다. 이처럼 엑스포는 인터넷이 나오기 한 세기 전부터 지구촌을 연결하는 네트워크였다. 세계인들은 인간 상상력의 한계를 넓힌 온갖 조형물과 전시물에 환호했다. 


거장 건축가들이 공간 조성에 창의력을 쏟아부은 박람회장 역시 기술 진보를 이끈 영감의 원천이었다. 수많은 과학자, 발명가, 학자, 예술가, 기업인들이 엑스포에서 성취 동기와 아이디어를 얻고 성과물을 내놓았다. 국제박람회기구(BIE)가 관장하는 세계박람회는 2020년 두바이엑스포까지 총 69회가 열렸다. 171년 엑스포 역사 속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10대 명장면을 뽑아 소개한다. 

Scene 1. ‘평화와 진보’의 제전 - 1851년 런던박람회

런던박람회 개막식에 많은 군중이 운집한 모습

1851년 런던박람회 개막식에서 빅토리아 여왕이 개막선언 하는 장면 (출처: https://www.shutterstock.com)

1851년 5월 1일, 영국 런던 하이드파크에서 빅토리아 여왕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행사가 열렸다. 바로 엑스포의 효시인 런던박람회의 개막식이다. 런던 박람회장은 ‘수정궁(Crystal Palace)’이라 불렸다. 길이 563m, 너비 124m에 전시 면적만 축구장 11개 크기인 9만 2,200㎡의 거대한 온실 형태인 전시관이었다. 32개국에서 출품한 전시물은 1만 3,000종, 100만여 점에 이르렀다. 


높이 35m, 길이 70m의 기중기를 비롯해 증기엔진, 압착기, 인쇄기 등 중후장대(重厚長大)한 영국산 기계류가 관람객을 압도했다. 재봉틀, 수세식 화장실, 색소폰, 고무 타이어, 곡물수확기 등 수많은 발명품도 첫선을 보였다. 19세기 중반은 대영제국의 위세가 정점에 달한 시기였다. 영국은 당시 산업혁명 덕분에 공업기술과 기계문명에 관한 한 절대 우위를 점한 상태였다. 


수정궁에서 열린 개막식은 인류문명사에서 국제교역과 소통의 새로운 장을 연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개막선언에 이어 부군 앨버트 공은 “박람회는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을 진보시키고 지구상 모든 나라의 평화와 유대를 강화하게 될 것”이라는 개막사를 남겼다. 평화와 진보, 교류의 가치는 이후 엑스포 역사를 관통하는 정신적 지주로 남았다. 

Scene 2. ‘발명왕’ 에디슨의 활약 - 1878년 파리박람회

에디슨이 축음기를 사용하는 모습

토머스 에디슨이 축음기를 시연하는 모습 (출처: https://www.shutterstock.com)

토머스 에디슨은 초기 세계박람회를 빛낸 ‘슈퍼스타’였다. 1878년 파리박람회에서 백열전구와 확성기, 축음기를 선보였다. 아울러 축음기에 자신이 직접 부른 노래(동요 ‘떴다 떴다 비행기’의 원곡 ‘Mary had a little lamb’)를 녹음해 들려줬다. 관람객들은 이 ‘노래하는 기계’를 보며 탄성을 질렀다. 에디슨의 전구는 파리 중심가와 오페라 거리를 환히 밝혀 ‘빛의 혁명’이란 찬사를 받았다. 에디슨은 이후 박람회에 계속 참가해 활동사진 영사기, 투시경 등 각종 발명품을 내놓았다. 


1915년, 에디슨은 샌프란시스코박람회에서 장거리 전화를 시연했다. 당시 67세였던 그는 수많은 관람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뉴저지주 자신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양쪽 참관자들이 환호를 터트렸다. 미 대륙을 횡단하는 장거리 전화가 최초로 개통되는 순간이었다. 잠시 후 에디슨의 친구 한 사람이 축음기에 녹음한 조금 전 통화내용을 전화로 들려주자 감탄과 환성이 절정에 달했다. 

Scene 3. 엑스포 최고 유산 에펠탑 탄생 - 1889년 파리박람회

오늘날 에펠탑과 에펠탑을 건설 중인 흑백 사진

오늘날 에펠탑과 1889년 파리박람회 기념물로 건설 중인 에펠탑 (출처: https://www.shutterstock.com)

에펠탑은 서구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유명해져 이젠 엑스포라는 탄생 배경이 희미해졌지만, 사실 박람회장 기념물 겸 출입구로 조성된 건축물이다. 1889년 파리박람회 기념물 공모에서 구스타브 에펠이 설계하여 제안한 세계 최고 높이(302.6m)인 철탑이 바로 에펠탑이다. 1889년 5월, 파리박람회 개막에 맞춰 에펠탑이 위용을 드러냈다. 에펠탑은 이후 독특한 면모로 세계적 명성을 얻으며 엑스포가 남긴 최고의 유물이 됐다. 


사실 에펠탑은 건설 당시 파리의 수려한 경관을 해치는 흉물이 될 것이라는 비판과 반대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세워진 뒤 에펠탑의 가치는 날로 높아졌다. 특히 탑에 올라 파리를 내려다보는 관광이 큰 인기를 끌었다. 1년도 안 돼 입장료 수입만으로 투자 비용을 전부 회수했을 정도였다. 


1900년 파리박람회에서 에펠탑은 1만 6,000개의 컬러 전구를 설치해 빛의 향연을 펼쳤다. 과학기술이 꽃피운 전기의 마력 속에 도시재건 사업을 통해 완성된 파리의 경관이 빛났다. 에펠탑은 애초 1910년 해체될 예정이었으나,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명물이 되면서 영구보존 결정이 내려졌다. 참고로 파리는 1937년까지 총 여섯 차례 박람회를 열어 최다 엑스포 개최지 기록을 세웠다. 

Scene 4. ‘대조선(Korea)’ 국호로 첫 참가한 우리나라 - 1893년 시카고박람회

시카고 박람회 전경과 내부에 차려진 한옥 형태의 코리아전시실

1893년 시카고박람회 전경과 코리아전시실

1893년 5월 1일 시카고박람회에 특이한 전시실이 등장했다. ‘대조선(Korea)’의 국호를 내건 우리나라가 한옥 형태의 전시실과 함께 처음 세계박람회에 참가한 장면이었다. 참가단장 정경원을 대표로 한 조선 사절단은 현지에서 기와를 구워 43.3㎡짜리 전시실을 지었다. 비록 참가국 중 가장 작은 규모였지만, 이국적 풍모의 전시물로 호기심에 찬 관람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앞면에 가마와 유리 진열장을 놓고 관복, 갓, 도포, 토시, 버선, 짚신 등 복식류와 생활용품, 투구, 덮개, 조총 등 군용품을 전시했다. 지붕엔 대형 태극기를 달았다. 금, 옥, 주단 등은 진열장 안에 두었고 피물, 발, 돗자리 등은 벽에 걸었다. 진귀한 물품에 대해 질문이 끊이지 않자 전시물 이름과 용도를 영어로 써 붙였다.


장악원 소속 악공 10명은 개막식 날 스티브 클리브랜드 미국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악을 연주했다. 사상 최초로 우리 가락이 이역만리 미국 땅에 울려 퍼진 것이다. 당시 전시물은 현재 시카고의 ‘필드 자연사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그중 30점이 딱 100년 뒤인 1993년 대전박람회에서 전시됐다. 우리나라는 1900년 파리박람회에 두 번째로 참가했으나 국권 상실 이후에는 세계박람회에 나가지 못했다. 

Scene 5. 사상 첫 텔레비전 생중계 - 1939년 뉴욕박람회

뉴욕박람회 개막식에 많은 군중이 운집한 모습

사상 최초로 텔레비전 생중계된 1939년 뉴욕박람회 개막식 (출처: https://www.bie-paris.org/)

1939년 4월 30일 열린 뉴욕박람회 개막식은 세계 최초로 텔레비전이 중계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개막사에 이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우주 광선에 대해 연설했다. 이 장면은 NBC 방송이 첫 정규 방송으로 송출했고, RCA가 개발한 기술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송신탑을 이용했다. 텔레비전 시대의 도래를 알린 이 방송은 당시 뉴욕 일대에 보급된 텔레비전 수상기 200여 대로 시청할 수 있었다. 


뉴욕박람회의 대표적 전시물은 텔레비전 수상기, 로봇, 에어컨디셔너, 전자계산기, 나일론 등이었다. 아울러 뉴욕박람회는 먼 훗날 세대에 보내는 타임캡슐을 만들었다. 2.3m 길이 통에 시대상을 대표하는 물건 35종을 넣어 기념탑 지하 15m에 묻었다. 개봉 예정일은 무려 5,000년 뒤인 서기 6939년으로 했다. 타임캡슐 안에는 미키마우스 손목시계, 깡통따개, 야구공, 안전면도기, 카멜 담배, 1달러 동전, 농작물 씨앗, 아인슈타인의 책, 신문, 잡지 등을 넣었다. 엑스포는 ‘지상 최대의 쇼’로 불린 뉴욕박람회에서 변곡점을 맞았다. 기술문명이 이룩한 인류의 성취를 집대성하는 기존 박람회 방식에 정점을 찍었다. 

Scene 6. 평화·공존을 향하여 - 1958년 브뤼셀박람회

아토미움이 설치된 공원과 분수대 주변 모습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상징한 1958년 브뤼셀박람회 기념탑 ‘아토미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엑스포는 10여 년간 정체기를 맞았다. 2차 대전은 한 세기의 연륜을 쌓아온 엑스포의 존폐를 위협하는 근본적 의문을 제기했다. 엑스포의 가치이자 존립 기반인 과학기술 진보가 가공의 대량살상이라는 부메랑이 됐다는 의식이 높아졌다. 엑스포가 그토록 찬양하고 열광했던 과학기술이 인류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결과로 돌아왔던 것이다. 


1958년 4월 어렵사리 열린 브뤼셀박람회는 이전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주제부터 인도주의와 인류에 봉사하는 과학기술, 인간성 회복으로 설정됐다. 박람회장 중앙에 세워진 상징탑 ‘아토미움’ 역시 주제를 압축적으로 구현했다. 원자 구조를 1,500억 배로 확대한 이 조형물은 ‘양날의 칼’인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상징했다. 


아토미움은 지름 18m의 원구 8개를 관으로 연결한, 높이 102m의 탑이다. 원구 내부는 전시실, 관망대 등으로 쓰이고, 연결관에는 각 원구를 오갈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돼 있다. 아토미움은 지금도 관광객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참고로 브뤼셀에 이어 열린 1967년 몬트리올박람회도 셍텍쥐베리의 인도주의를 주제로 설정해 공동체적 유대감을 강조했다. 

Scene 7. ‘아시아 시대’의 개막 - 1970년 오사카엑스포

오사카 박람회장 상징조형물인 태양의 탑이 서 있는 모습

(좌)1970년 오사카 박람회장. 왼쪽 원통형 기둥이 있는 전시관이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한국관이다, (우)엑스포 상징조형물 ‘태양의 탑’ (출처: https://www.shutterstock.com)

1970년 3월 14일, 일본 오사카에서 아시아 최초의 엑스포가 막을 올렸다. 히로히토 일왕은 ‘인류의 진보와 조화’라는 주제로 개막선언을 했고, 이로써 일본은 엑스포를 통해 패전국에서 경제대국으로 부활했음을 세계만방에 알렸다. 박람회장은 오사카 교외에 이상적인 미래도시 양식으로 조성됐다. 공동구역 중앙에 70m 높이 조형물 ‘태양의 탑’을 세웠다. 


오사카엑스포에서 가장 인기를 끈 전시물은 월석(달에서 온 돌)이었다. 1969년 7월 16일,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가 가져온 것으로 우주선 모형과 함께 미국관에 전시됐다. 또 다른 히트작은 아이맥스 영화였다. 지금껏 인류가 경험한 적이 없는 시각을 제공한 아이맥스는 가로 22m, 세로 16m의 초대형 플랫폼 화면에 투사돼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오사카엑스포는 1964년 도쿄올림픽과 개발 효과를 주고받으며 큰 성과를 거뒀다. 참가국 77개국, 관람객 수 6,422만 명의 신기록을 세웠다. 오사카엑스포는 세계 경제 기운이 동아시아로 넘어왔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개최지가 다변화하며 문화적 다양성의 자양분을 흡수한 엑스포는 더 이상 서방 선진국의 전유물이 아닌 공생의 문명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Scene 8. 4차 산업혁명 발원지 - 2000년 하노버엑스포

하노버엑스포 주제관 앞에 사람이 거니는 모습

나무를 조형화한 2000년 하노버엑스포 주제관

2000년 6월 1일, 독일 하노버에서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는 새로운 양식의 엑스포가 문을 열었다. 영역별로 6개의 글로벌 프로젝트를 제시하고, 참가국이 이를 곳곳에서 함께 풀어나가는 방식이었다. 각 프로젝트는 주제 구역으로 가시화됐다. 건강과 영양, 주거와 일, 환경과 개발, 통신과 정보, 레저와 교통, 교육과 문화 등 인류가 직면한 6개 공통 과제는 하위 주제로 나뉘었다. 


예컨대 친환경 건축자재의 경우 280개 프로젝트가 독일 전역에서 진행됐다. 과학기술 진보와 자연환경이 균형점을 찾지 못한다면 온전한 인간생활이 유지될 수 없다는 주제 의식은 박람회장 공간 조성부터 전시 운영까지 일관되게 적용됐다. 재활용 종이로 전시관을 이은 일본관을 비롯해 많은 참가국이 친환경 자재를 활용했다. 


이런 활동으로 하노버박람회는 엑스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교통·에너지 등에서 지속가능성을 강조해 4차 산업혁명의 발원지로 자리매김했다. 21세기 엑스포는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한 인식의 확장, 스토리텔링, 상호작용형 공유와 체험 방식으로 전시 콘텐츠와 기법 모두가 진화했다. 

Scene 9. ‘잠에서 깬 용’ 중국의 포효 - 2010년 상하이엑스포

상하이엑스포 개막을 알리는 불꽃 축제의 모습

2010년 상하이엑스포 개막식의 화려한 불꽃쇼. 푸둥의 고층빌딩과 황푸강 위 배에서 폭죽 10만여 발을 발사해 축제의 열기를 달궜다

2010년 4월 30일 저녁 8시, 상하이 황푸강변에서 중국 특유의 화려한 불꽃쇼가 밤하늘을 밝혔다. 은빛 비행접시 모양의 엑스포센터에선 20여 개국 정상이 참석한 가운데 상하이엑스포 개막식이 열렸다. 중국은 ‘모든 것은 엑스포로 통한다’는 구호 아래 7년간 엑스포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랜드마크인 중국관은 전통 목조건축 기법으로 지은 6만 8,000㎡ 규모의 중국홍색 건축물로, 중국이 세계인에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집약돼 있었다. 


상하이엑스포는 여러 면에서 종전 기록을 갈아치웠다. 523만㎡ 부지에 펼쳐진 박람회장 규모와 190개국 참가, 관람객 수 7,308만 명은 아직까지 최대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하루 최다 입장객 수도 사상 최초로 100만 명을 넘겼다. 북한과 대만이 처음으로 엑스포에 참가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상하이엑스포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과 함께 중국의 국격을 높이고, 경제 성장의 기폭제이자 국민통합 기제로 작용했다. 중국 다음으로 큰 규모였던 한국관도 역대 최다인 725만 명의 관람객을 기록했다. 보통 서너 시간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아 “한국관 입장이 한국 가기보다 더 어렵다”는 말까지 나왔다. 

Scene 10. 인공섬에 짓는 ‘꿈의 도시’ - 2025년 오사카·간사이엑스포

오사카-간사이 박람회장 조감도의 모습

오사카 앞바다 인공섬에 조성되는 2025년 오사카·간사이 박람회장 조감도. 핵심 전시구역 외곽에 옥상보행이 가능한 링 형태 건축물을 세울 예정이다

이번에 다룰 엑스포의 마지막 명장면은 3년 뒤 펼쳐질 미래의 모습이다. 2025년 오사카·간사이엑스포장은 오사카 남서쪽 앞바다 155만㎡ 넓이 인공섬 유메시마(夢洲)에 조성된다. 유메시마는 오사카 앞바다 시유지인 3개 인공섬 가운데 하나다. 2008년 하계올림픽 후보지로 해저터널 건설 등 투자가 이뤄졌으나 탈락 이후 미개발 상태로 있었다. 엑스포 유치 덕분에 20년간 방치됐던 해저터널이 마침내 빛을 보게 된 셈이다. 인근 2개 인공섬에는 대규모 상업시설과 테마파크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 등이 들어서 연계 관광지 역할을 하게 된다. 


박람회장은 주제관과 참가국 전시관이 들어서는 파빌리온 월드, 녹지와 야외 행사 플라자로 이뤄진 그린 월드, 플로팅 호텔과 분수대 등의 워터월드로 구성된다. 전시관 배치는 중앙 랜드마크 시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통상 방식에서 벗어나 탈중앙 분산화를 지향한다. 주제관도 하나의 큰 전시관 대신 11곳에 분산 배치된다. 세포분열, 벌집 등에서 발견되는 보로노이 다이어그램(Voronoi diagram)을 차용한 구상이다. 무작위로 흩어진 전시관은 지구촌 전역에 퍼진 80억 인구가 만들어갈 미래 사회 콘셉트를 반영할 예정이다.


글. 오룡(칼럼니스트)

언론인 출신 작가, 번역·집필가로 인문학·문화·역사 분야 글을 쓰고 있다. 인류문명의 쇼케이스가 돼온 엑스포 역사에 매료돼 온갖 산물의 미시사를 탐구하고 정리했다. 서강대와 동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한겨레신문 기자, 아시아기자협회 사무총장, 국제평화재단 사무국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 <상상력의 전시장 엑스포>(201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