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18 현대 모터스포츠팀
지난 6월 아프리카 케냐 사파리 랠리(Safari Rally Kenya)에서 시즌 반환점을 돈 WRC가 유럽으로 돌아와 제7전인 에스토니아 랠리(Rally Estonia)를 시작했다.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함께 발트 3국 중 하나인 에스토니아는 현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작은 국가 규모에 비해 우크라이나에 많은 원조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랠리 본부와 서비스 파크가 위치한 타르투(Tartu)에는 많은 관중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뤘다.
2010년 처음 시작된 에스토니아 랠리는 2014년부터 ERC(European Rally Championship, 유러피안 랠리 챔피언십)의 일부가 됐고, 2020년부터 마침내 WRC로 승격됐다. 때문에 에스토니아 랠리는 현재 WRC에서 가장 젊은 랠리에 속한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핀란드 랠리를 위한 예행 연습 목적으로 적잖은 출전자들이 에스토니아를 찾았다.
오랜 기간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이었던 에스토니아는 인구 130만 명의 작은 나라로, GDP도 306억 5,000만 달러(한국은 1조 6,000억 달러가 넘는다)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WRC 입성이 번번이 무산됐던 것도 높은 등록비용 문제였다. 하지만 지난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비상사태로 인해 기회가 찾아와 33번째 WRC 개최국이 될 수 있었다. 에스토니아는 자동차 제조사도 없다. 대신 마르코 마틴(Markko Märtin), 오트 타낙(Ott Tänak) 같은 유명 랠리 드라이버를 배출해 왔다. 특히 2019년 WRC 월드 챔피언이자 에스토니아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 스타인 오트 타낙의 높은 인기는 WRC 진출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
WRC 3년 차인 에스토니아 랠리는 핀란드와 매우 비슷한 특성을 보인다. 고운 자갈과 흙이 덮인 매끈한 노면에 비교적 완만한 코너로 이뤄진 스테이지에서 엄청난 스피드 경쟁을 벌인다. 노면 굴곡이 많아 점프가 잦은 점도 닮았다. 차가 공중에 떠있는 동안에는 컨트롤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고속 점프는 엄청난 위험을 동반한다. 그만큼 빠른 판단과 정확한 페이스 노트를 필요로 하며 실수를 만회할 여유도 없다. 올해 에스토니아 랠리는 24개 스테이지에 314.26km로 구성돼 지난해보다 경기 구간이 살짝 짧아졌다.
현대팀의 드라이버진은 사파리 랠리와 같이 티에리 누빌(Thierry Neuville)과 오트 타낙(Ott Tänak), 올리버 솔베르그(Oliver Solberg)였다. 누빌은 사파리 랠리에서 포디엄 등극에 실패하며 도요타의 칼빈 로반페라(Kalle Rovanperä)와 점수 차가 더 벌어졌지만 챔피언십 2위로 현대팀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홈그라운드에서 경기를 치르는 타낙은 당연히 에스토니아 랠리를 가장 기다려 온 주인공이다. 지금까지 에스토니아 랠리에 11번 출전했던 타낙은 4번 우승을 차지해 역대 최다 우승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올 시즌 챔피언십 선두인 도요타의 로반페라 역시 에스토니아 랠리에서 강한 면모를 보여왔다. 로반페라는 지난해 에스토니아 랠리에서 우승하며 20세 239일이라는 최연소 WRC 우승 기록을 세운 바 있다. 사파리 랠리에서 1-2-3-4위라는 고무적인 성적을 거뒀던 도요타는 에스토니아 랠리에 앞서 다시 한번 엔진 업데이트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현대팀 대비 랠리카의 최고속이 다소 떨어지는 문제를 보완하고자 한 것이다. 드라이버진은 로반페라를 필두로 엘핀 에반스(Elfyn Evans)와 에사페카 라피(Esapekka Lappi), 다카모토 가츠타(Takamoto Katsuta)로 꾸렸다.
M-스포트 포드에서는 크레이그 브린(Craig Breen), 거스 그린스미스(Gus Greensmith), 아드리안 포모(Adrien Fourmaux)와 피에르루이 루베(Pierre-Louis Loubet)가 출전했다. 브린은 지난해까지 에스토니아 랠리에서 2연속 2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서비스 파크는 이번에도 에스토니아 제2의 도시 타르투에 마련됐다. 목요일 저녁 세레모니얼 스타트 장소는 타르트 구시가지의 아름다운 시청 광장으로 되돌아왔다. 공식 행사 후 참가자들은 인근 공원(Visit Estonia Tartu)에 마련된 1.66km의 단거리 SSS1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오프닝 스테이지에서는 M-스포트 포드의 브린이 가장 빨라 종합 선두에 올랐다. 반면, 현대팀의 타낙은 경기를 마친 후 지정된 구역에서 전기 모드로 운행하지 않아 10초의 패널티를 받으면서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타낙이 패널티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올해 도입된 WRC의 새로운 규정 때문이다. WRC는 친환경이라는 세계적 흐름에 따라 올해부터 하이브리드카인 랠리1 규정을 전격 도입했다. 당초 이동 구간을 전부 모터로만 달려 배출가스를 저감한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지만, 3.9kWh 용량의 배터리로는 완충 상태에서도 주행거리가 20km 정도에 불과하다. 이런 이유로 결국 서비스 파크와 일부 지정된 구간에서만 EV 모드를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이 바뀌었는데, 타낙이 이를 실수로 지키지 못해 10초의 패널티를 받은 것이다.
7월 15일 금요일 일정은 타르투 북쪽과 남쪽에 나뉘어 있는 4개 스테이지를 오전과 오후에 반복한다. 때문에 참가자들은 이번 경기 중 가장 긴 SS2~SS9의 8개 스테이지, 139.18km 구간에서 속도를 겨뤘다. 오프닝 스테이지는 24.35km로 에스토니아 랠리 가운데 가장 길었다. SS4와 SS8에 해당하는 라니차(Raanitsa)는 지난해 평균 속도가 가장 높았던 고속 스테이지이다. 다만 올 시즌은 지난해와 비교해 시작과 끝부분의 구성이 약간씩 달라졌다.
이날은 도요타의 에반스가 아침부터 5개 스테이지를 휩쓸며 종합 선두를 달렸다. 그립 개선을 위해 여러 세팅을 시험하던 현대팀의 타낙은 오전 루프를 마쳤을 때 선두 에반스와 22.5초 차이로 종합 3위에 올랐으며, 현대팀의 누빌은 41초 차이로 종합 4위를 지켰다. 오후에 비가 내리면서 컨디션이 급변하자 이번에는 도요타의 로반페라가 기세를 높였다. 가장 먼저 출발해 아직 노면 상태가 양호할 때 좋은 기록을 낼 수 있었던 로반페라는 SS7과 SS8을 톱타임으로 달리며 에반스와의 차이를 좁히더니 SS9에서 기어코 추월에 성공해 종합 선두로 올라섰다.
흙바닥이 진흙으로 바뀌고 물웅덩이도 생겨나 랠리카들의 발목을 잡았다. 이는 현대팀도 마찬가지였다. 타낙은 앞유리 히터 문제로 시야가 가려 SS9에서 20초 넘는 손해를 보았고, 핸들링 문제로 고전한 누빌은 다소 조심스러운 접근으로 위험을 피하는 데 집중했다.
금요일을 마치는 시점에서 도요타의 로반페라를 선두로, 에반스가 11초 차이로 뒤를 따랐다. 이어서 현대팀의 타낙이 3위, 도요타의 라피가 4위였다. 현대팀의 누빌은 라피와 7초 차이로 5위에 머물렀다. M-스포트 포드의 포모, 도요타의 가츠타, M-스포트 포드의 그린스미스와 루베가 그 뒤를 따랐다. 목요일을 선두로 시작했던 M-스포트 포드의 브린은 SS4 고속 코너에서 풀숲에 처박히며 리타이어 하고 말았다. 타낙처럼 하이브리드 미사용으로 인해 10초 페널티도 받았다. SS7에서 나무와 충돌한 현대팀의 솔베르그는 하위권으로 밀려났다.
7월 16일 토요일은 에스토니아의 겨울 수도라고 불리는 남쪽 오테파(Otepää)를 중심으로 스테이지가 구성됐다. SS10 엘바(Elva)를 시작으로 4개 스테이지를 반복해 달린 후 금요일 달렸던 타르투의 단거리 스테이지에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9개 스테이지의 합계 경기 구간 길이는 95.4km였다. 오프닝 스테이지에서는 로반페라, 이어진 SS11에서는 에반스가 톱타임을 기록하며 치열한 선두 싸움을 이어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후 내리 6개 스테이지를 제압한 로반페라가 앞서 나갔다. 에반스는 공격적인 달리기로 추격을 시도했지만 토요일 일정을 마쳤을 때는 29.1초로 차이가 벌어져 있었다.
현대팀 진영에서는 홈그라운드의 타낙도 로반페라, 에반스보다 조금씩 페이스가 밀렸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있었다. 종합 4위의 라피가 SS12 오테파에서 타이어 펑크를 당하면서 누빌이 종합 4위로 올라선 것이다. 다만 누빌은 핸들링 문제에 더해 코드라이버가 통증을 호소해 페이스를 끌어올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미 득점권에서 멀어진 솔베르그는 SS12에서 막힌 라디에이터를 청소하느라 다시 1분을 허비했다.
토요일을 종합 선두로 마무리한 것은 도요타의 로반페라였다. 같은 팀의 에반스가 2위, 현대팀의 타낙과 누빌이 3, 4위로 그 뒤를 이었다. 가츠타, 포모, 라피, 루베, 그린스미스가 5~9위에 올랐고, 10위 자리를 두고 WRC2 클래스의 안드레아 미켈센(Andreas Mikkelsen, 스코다)과 티무 수니넨(Teemu Suninen, 현대팀)이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7월 17일 일요일, 에스토니아 랠리 승자를 결정하는 이 날은 6.56km의 타르투 발드(Tartu Vald)를 시작으로 16.48km의 카네피(Kanepi) 그리고 15.95km의 캄비야(Kambja) 3개의 스테이지를 반복해 달렸다. 6개 스테이지를 합한 길이는 78.02km였다. 지난해 금요일에 달렸던 캄비야 스테이지가 다시 최종 파워 스테이지로 돌아왔다.
마지막날까지 로반페라의 스피드는 맹위를 떨쳤다. 오프닝 SS19부터 3개 스테이지 톱타임을 기록한 로반페라는 SS23에서 속도를 낮춰 타이어를 보호하며 최종 파워 스테이지에 대비했다. 경기 막판에는 또다시 비가 내리며 노면 컨디션이 다시 악화됐다.
결국,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도요타의 로반페라가 에스토니아 랠리의 승자가 됐다. 시즌 5승째를 챙긴 로반페라는 WRC 최연소 챔피언 등극에 한발 더 다가섰다. 로반페라는 최종 SS24 파워 스테이지 톱타임으로 5점의 추가 점수까지 챙겼다. 반면, 토요일에 추월 당한 도요타의 에반스는 이후 한 번도 주도권을 되찾지 못했다.
홈 팬들의 열렬한 응원을 받은 현대팀의 타낙은 3위로 시상대 마지막 자리를 차지했다. 마지막 스테이지에서 추가 점수를 노렸던 누빌은 시야 확보 문제 때문에 힘겨워 했음에도 종합 4위라는 귀중한 결과를 달성했다. 뒤이어 가츠타 5위, 라피 6위, 포모가 7위에 올랐고, WRC2 클래스의 미켈센, 수니넨, 린드홀름이 득점권을 마무리했다.
올 시즌 챔피언십 순위에서는 도요타의 로반페라가 175점으로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에스토니아 랠리에서 4위에 오르며 귀중한 포인트를 추가한 현대팀의 누빌 또한 92점으로 여전히 2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중이다. 이어서 79점을 쌓은 도요타의 에반스가 3위, 이번 에스토니아 랠리에서 시상대에 오른 타낙이 77점으로 3위 자리를 바짝 뒤쫓고 있다.
한편, 다음 경주는 에스토니아의 북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핀란드에서 8월 4~7일 열린다. 에스토니아와 비슷한 그래블 노면을 지녔으며, 7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핀란드 랠리는 WRC를 통틀어 경기 속도가 가장 빠른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지난해 현대팀이 2, 3위를 차지했던 곳인 만큼 올 시즌 핀란드 랠리에서도 현대팀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기를 기대하도록 하자.
글. 이수진(자동차 평론가)
1991년 마니아를 위한 국산 자동차 잡지 <카비전> 탄생에 잔뜩 달아올라 열심히 편지를 보냈다가 덜컥 인연이 닿아 자동차 기자를 시작했다.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편집장과 편집 위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자동차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전기차와 커넥티드카, 자율주행 기술 같은 최신 트렌드를 열심히 소개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름 냄새 풍기는 내연기관 엔진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자동차 덕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