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25 현대 모터스포츠팀
지난해 WRC 캘린더에 처음 등장한 크로아티아 랠리가 올해로 2년째를 맞았다. 크로아티아 랠리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시절이던 1974년 델타 랠리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1991년 크로아티아로 독립한 후에도 계속 이어져 왔다. 그리고 지난해 코로나 사태 속에서 드디어 WRC 챔피언십의 하나로 캘린더에 자리를 잡았다. 프랑스와 독일이 빠진 타막(포장도로) 랠리의 빈자리를 채워 주었던 크로아티아 랠리는 하이브리드 랠리카가 질주하는 랠리1 시대 최초의 타막 랠리가 되었다.
크로아티아의 수도인 자그레브 서쪽, 슬로베니아와의 국경 근처에 마련된 스테이지는 다양한 포장 노면과 접지력을 예측하기 어려운 환경으로 참가자들을 맞이한다. 복잡한 코너와 잦은 점프로 인해 페이스 노트 작성 난이도는 최상위급. 특히 금요일에 달리는 움베락(Žumberak) 자연공원 내 도로는 ‘1,000개의 굴곡’이라고 표현할 만큼 직선이 거의 없고 끝없이 구불거려 내비게이션을 착각하기 쉽다. 게다가 올해는 비 예보가 있어 지난해보다 더 어려운 경기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총 291.84km의 20개 스테이지로 이뤄진 크로아티아 랠리는 치열한 무대가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신차 개발 프로젝트 출발이 다소 늦어 개막전 몬테카를로에서 고전했던 현대 월드랠리팀(이하 현대팀)은 2라운드 스웨덴 랠리에서 누빌이 2위에 오르며 분위기 역전에 성공했다. 그렇기에 2월 27일 스웨덴 랠리가 끝나고 4월 21일 크로아티아 랠리가 열리기까지 8주간의 공백은 현대팀에게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었다.
최근 현대모터스포츠법인(HMSG)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신임 법인장을 플랫폼과 차량 개발 전문가인 김선평 상무가 맡았다. 김선평 상무는 HMSG 설립의 일등 공신 중 한명으로, WRC 랠리카 프로토타입 개발은 물론 i30 N, 벨로스터 N 개발에도 참여했다. 아울러 줄리앙 몽쉐(Julien Moncet) 현대팀 부단장이 지난 시즌 후 자리에서 물러난 안드레아 아다모 감독의 뒤를 이어 팀을 지휘하고 있다.
현대팀의 드라이버 라인업은 티에리 누빌(Thierry Neuville), 오트 타낙(Ott Tanak), 올리버 솔베르그(Oliver Solberg)로 3경기 연속 동일했다. 개막전 6위, 스웨덴 2위를 기록하며 드라이버 챔피언십 2위로 올라선 누빌은 현대팀의 승리를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반면 개막전 리타이어, 스웨덴에서는 하이브리드 시스템 트러블에 발목이 잡힌 타낙은 스웨덴 랠리 파워 스테이지에서 얻은 5점으로 챔피언십 11위를 기록 중이다. 신예 솔베르그는 스웨덴 6위(8점)로 챔피언십 10위다.
도요타팀은 칼리 로반페라(Kalle Rovanpera), 엘핀 에반스(Elfyn Evans), 에사페카 라피(Esapeka Lappi), 다카모토 가츠타(Takamoto Katsuta)까지 4대의 야리스 랠리1을 투입했다. 포드팀은 크레이그 브린(Craig Breen), 아드리안 포모(Adrien Fourmaux), 거스 그린스미스(Gus Greensmith)를 출전시켰다. 여기에 피에르-루이 루베(Pierre-Louis Loubet)까지 푸마 랠리1을 태워 이번 시즌 중 가장 많은 11대의 랠리1 경주차가 엔트리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목요일 자그레브 서쪽에 마련된 3.65km 스테이지에서 셰이크다운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초반에는 날씨가 건조했지만, 이내 비가 내리면서 한층 까다로워질 본경기를 예고했다. 타막 랠리는 그레이블(비포장 도로)에 비해 출발 순서에 따른 유불리의 편차가 적다. 하지만 노폭이 좁은 크로아티아에 비까지 내리면 앞서 달리는 차들이 주변의 자갈과 진흙을 긁어 올려 뒤에서 출발할수록 불리해진다. 그레이블 랠리와는 완전히 반대인 셈이다.
4월 22일 금요일 아침, 어제의 테스트 코스에서 조금 더 서쪽에 위치한 19.2km의 말리 리포벡-그르다니치(Mali Lipovec - Grdanjci) 스테이지에서 경기가 시작되었다. 4개 스테이지를 오전 오후에 반복해 달리는 SS1~SS8의 120.38km 구성이다.
도요타팀의 로반페라가 초반 2개 스테이지를 잡으며 종합 선두로 나섰다. 하지만 같은 팀의 라피는 9.9km 지점에서 바위를 들이받아 가장 먼저 리타이어했다. 누빌은 도랑에 빠지는 바람에 진흙이 휠 안쪽에 끼어 고전하면서도 2위 자리를 지켰다. 타낙이 근소한 차이로 3위. 브린, 그린스미스, 솔베르그가 뒤따랐다. 에반스는 타이어 펑처에 발목 잡혀 선두와 2분 가까이 벌어졌고, 루베는 SS2에서 왼쪽 앞 타이어가 파손됐는데, 스페어타이어가 없어 경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타낙은 SS6에서 누빌을 제쳐 종합 2위로 부상했다. 누빌이 4위, 솔베르그도 종합 5위로 현대팀 트리오가 모두 상위권에 올랐다. 누빌은 오전 루프를 마친 직후 제너레이터 고장으로 차가 멈추는 바람에 서비스 파크에 늦게 도착한 데다, 스테이지 사이 이동구간에서 과속으로 추가적인 페널티까지 받아 종합 4위로 밀렸다.
금요일을 마감하는 시점에서는 로반페라가 종합 선두. 타낙이 1분 23초 차이로 2위, 브린이 3위를 기록했다. 4위 누빌은 오후에도 페이스가 좋았기에 페널티가 더욱 아쉬웠다. 그래도 브린과의 시차는 28.8초까지 줄였다. 솔베르그가 종합 5위, 에반스와 가츠타가 뒤를 이었다.
토요일은 SS9~SS16의 8개 스테이지 116.98km를 달렸다. 금요일과 마찬가지로 4개 스테이지를 오전과 오후에 반복했다. 일부 구간은 비와 진흙으로 미끄러운 데다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려 난이도는 극악으로 치달았다. 도요타팀의 에반스와 라피가 각각 SS9, SS10에서 가장 빨리 달려 분위기 반전을 노리기도 했다. SS11과 SS12에서는 현대팀의 타낙과 누빌이 차례대로 톱 타임을 기록해 더블 포디엄을 향해 진격했다.
짙은 안개가 낀 SS11 플라탁(Platak)은 특히나 어려워 몇몇 선수들은 자신의 경험 중 최악의 컨디션이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종합 선두 로반페라는 드라이 타이어를 끼운 라이벌들과 달리 웨트 타이어를 선택했지만, 타이어 펑처 때문에 50초 이상을 잃었다. 반면 같은 선택을 한 타낙은 이번 경기 첫 톱 타임을 기록하며 추격의 고삐를 당겼다. 솔베르그는 아쉽게도 사고로 리타이어했다.
타낙의 추격전은 오후에도 이어져 SS13을 마쳤을 때 선두와의 시차는 13초까지 줄었다. 로반페라도 반격에 나섰다. 해발 1,000m 이상을 오르는 SS15 플라탁이 짙은 안개로 취소된 가운데 로반페라가 SS16을 잡아 타낙과의 시차를 19.9초로 벌렸다. 로반페라를 선두로 타낙, 브린이 뒤따랐다. 누빌은 SS13 막판 엔진 트러블에도 불구하고 브린과 4.9초 차 4위로 포디엄을 가시권에 두고 토요일을 마무리했다.
4월 24일 일요일. 자그레브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13.15km의 트라코샨-브르브노(Trakošćan - Vrbno)와 14.09km의 자고르스카 셀라-쿰로벡(Zagorska Sela - Kumrovec) 2개 스테이지에서 마지막 승부가 펼쳐졌다. 일요일 54.48km의 경기 구간은 지금까지와 비교해 도로 폭이 넓었다. SS18을 다시 달리는 자고르스카 셀라-쿰로벡(SS20)이 최종 스테이지이자 최대 5점이 걸린 파워 스테이지다.
아침 7시에 시작된 SS17에서 로반페라는 라피에 이은 2위를 기록하며 종합 선두 자리를 굳건히 했다. 타낙은 비가 올 가능성을 보고 4개의 소프트와 2개의 웨트 타이어를 싣고 출발했다가 오히려 거리가 더 벌어졌다. 3위 싸움도 선두 경쟁만큼이나 치열했다. 누빌은 SS18 톱 타임으로 종합 3위인 브린과의 격차를 2.2초까지 줄였다.
오프닝 SS17을 다시 달린 SS19. 그런데 많은 비가 내리면서 타낙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웨트 타이어 선택이 맞아떨어져 톱 타임을 기록한 것. 전날 S11 톱 타임에 이은 2번째 기록이었다. 이로써 타낙은 마지막 스테이지를 앞두고 로반페라에 1.4초 앞서 종합 선두로 올라섰다. 누빌도 준수한 활약을 펼쳐 SS19를 마치고 종합 3위까지 순위를 끌어 올렸다. 파워 스테이지를 겸하는 최종 SS20은 타낙과 로반페라의 치열한 선두 경쟁으로 후끈 달아오르는 듯했지만, 날씨가 맑아지면서 노면이 빠르게 말라 타낙의 우승 진로에 먹구름이 끼었다.
크고 작은 문제에도 3위가 거의 확정적이던 누빌에게는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내리막에서 미끄러지며 도랑으로 질주하는 아찔한 장면을 연출했다. 게다가 인터콤 문제로 코드라이버 마틴 위데거가 손으로 방향을 알려주어야 했다. 하지만 누빌은 침착하게 차를 돌려 남은 구간을 완주했고, 벌려 놓았던 차이 덕분에 3위 자리를 지켜냈다. 반면에 타낙은 예상대로 드라이 타이어를 장착한 로반페라를 넘어설 수 없었다. 결국 SS20을 가져간 로반페라가 크로아티아 랠리 우승자가 되었다. 타낙은 불과 4.3초 차이로 2위, 누빌이 3위에 올랐다.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접전이었다.
간발의 차이로 우승을 놓치기는 했지만 현대팀은 시즌 첫 더블 포디엄으로 랠리카의 전투력이 개선되고 있음을 확실히 증명했다. 드라이버 챔피언십 포인트에서는 15점을 획득한 누빌이 2위(47점) 자리를 유지했고, 타낙은 22점을 추가해 5위(27점)로 부상했다. 팀 순위에서는 현대팀이 더블 포디엄에 힘입어 84점으로 포드팀을 밀어내고 2위로 뛰어올랐다. 다음 4라운드 포르투갈 랠리는 5월 19일에 열릴 예정이다.
글. 이수진 (자동차 평론가)
1991년 마니아를 위한 국산 자동차 잡지 <카비전> 탄생에 잔뜩 달아올라 열심히 편지를 보냈다가 덜컥 인연이 닿아 자동차 기자를 시작했다.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편집장과 편집 위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자동차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전기차와 커넥티드카, 자율주행 기술 같은 최신 트렌드를 열심히 소개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름 냄새 풍기는 내연기관 엔진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자동차 덕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