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5 현대자동차그룹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자동차 산업은 그 어떤 분야보다 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이에 수소 에너지, 전동화, 자율주행, UAM, 로보틱스 등 미래 모빌리티로의 전환을 위해 모든 역량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지난해 미국의 세계적인 경제 전문지인 포브스(Forbes)로부터 2020년 모빌리티 영역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현대차그룹에게 도전은 익숙한 단어입니다. 태생이 도전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고(故) 정주영 선대회장(이하 정 선대회장)은 기업을 넘어 한 국가의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자동차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어떠한 시련이 닥쳐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현대차그룹은 이런 철학과 정신을 계승해 혁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현재의 현대차그룹을 있게 한 선대회장의 삶과 경영에 대한 철학, 그리고 도전을 그의 어록을 통해 알아봤습니다.
정 선대회장의 도전 역사는 자동차와 함께 시작됐습니다. 1940년, 현대차그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자동차 정비소 아도 서비스(ART SERVICE)를 설립한 것입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46년, 아도 서비스는 명칭을 현대자동차공업사로 바꾸고 새로운 출발의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사명에 ‘현대’가 처음으로 등장하며 도전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가 첫 사업으로 자동차를 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는 기간산업 중에서 자동차 제조업을 으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동차는 달리는 국기다. 우리의 자동차가 수출되고 있는 나라라면 어느 곳에서나 자동차를 자력으로 생산, 수출할 수 있는 수준의 나라라는 이미지 덕택에 다른 상품도 덩달아 높이 평가된다. 자동차를 완벽하게 생산하면 그 나라의 기계공업은 항공기이든지 뭐든지 다 완벽하게 할 수 있다.”
그의 과감한 도전은 현대차의 첫 자동차 독자 모델 개발이라는 혁신으로 이어졌습니다. 한국의 국가대표로서 활약할 고유 모델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현실화한 것입니다. 그렇게 탄생한 모델이 바로 1975년 12월 생산된 ‘포니’입니다. 포니는 후륜구동의 4도어 세단으로, 현대차의 첫번째 독자 생산모델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국산 자동차였죠. 이후 포니는 한국의 대표 공산품으로써 1986년 미국에 처음으로 수출됐고, 이듬해 수입 소형차 부문 판매 1위라는 쾌거를 달성합니다. 그리고 현대차는 포니를 시작으로 쏘나타, 그랜저 등 현재까지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대표 모델을 선보이게 됩니다.
“자동차산업은 한 국가의 기술 척도이자, 그 나라 산업 수준을 끌어올리는 견인차다. 그래서 나는 현대자동차를 설립해 국산차 개발에 막대한 투자와 노력을 쏟아왔고, 자력으로 한국 최초의 승용차 고유 모델인 ‘포니’를 개발했다. 자동차산업을 일으키는 일은 일개 특정 기업 혼자서는 이룰 수 없으며, 그 산업이 세계 수준에 이르렀을 때 돌아오는 영광과 이익이 특정 기업에만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자동차산업은 전 국민적인 힘을 모아 육성해야 한다.”
자동차가 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로가 필요합니다. 1970년 완공 이후 서울부터 부산까지 한국의 중심을 연결하고 있는 경부고속도로 또한 정 선대회장의 도전과 혁신이 맺은 결실입니다. 나라 경제 발전을 위해 전국을 잇는 길을 닦은 것입니다. 현대건설은 태국의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를 완공하며 경험과 기술을 쌓은 이후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주도했습니다. 그 헌신과 공로를 인정받아 완공 후 금탑산업훈장을 수여 받기도 했죠.
“나의 관심사는 이 나라를 보다 균형 있게 발전시켜 보다 충실하고 질 높은 번영으로 이끌어 영광스러운 국가, 자랑스러운 민족으로 만드는 것에 내가 어떻게 기여해야 하는가에 있다.”
이후 경부고속도로는 그의 염원대로 한국 경제 고속 성장의 동력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후 정 선대회장은 해외 사회간접시설 건설까지 수주하며 현대건설의 기술력을 널리 알렸습니다. 그 시작은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유전지대인 주베일 지역의 산업시설을 위한 신항만 공사입니다. 이는 세계 건설업계에서 ‘20세기 최대의 역사’로 손꼽히는 거대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만큼 세계적인 건설사들이 경쟁에 뛰어들었고, 상대적으로 신생 업체인 현대건설의 도전은 무모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성공적으로 공사를 마치며 경쟁력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불굴의 도전, 모험정신 이것으로 누구나 다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면에는 치밀한 검토와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현대를 모험을 하는 기업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현대는 모험을 하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현대 계열기업은 어느 것 하나 실패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밖에서 볼 때 현대가 속단하고 모험을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치밀한 계획, 확고한 신념 위에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밀고 나가기 때문에 실패를 모르는 것이다.”
창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정 선대회장의 혁신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국내 최초의 현대식 조선소인 울산조선소가 좋은 예입니다. 1974년 조선소 건설과 유조선 건조를 동시에 해내는, 전 세계 조선사의 유일무이한 기록을 세웠습니다. 도크가 일부 완성되면 바로 그 위에서 선박을 제작해 나간 것이죠. 도크는 선박 제작 및 수리 등에 쓰이는 설비로, 조선소의 심장이자 생명줄로 여겨집니다.
그의 이런 대담한 행보는 조선업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조선소 건설이 장차 현대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어줄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번 작정한 일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은 나에게 전혀 장애가 안 된다.”
물론, 이는 성공에 대한 자신감도 바탕이 됐습니다.
“무슨 일을 시작하든, 된다는 확신 90%와 반드시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 외에 안될 수 있다는 불안은 단 1%도 갖지 않는다.”
창의성은 기존의 사고방식을 벗어나 다른 시각으로 사물 또는 현상을 바라보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소양강 다목적댐 또한 정 선대회장의 남다른 발상을 통해 완성된 결과물입니다. 소양강 다목적댐은 1967년부터 1973년까지 6년에 걸쳐 만들어진 댐으로, 당시 설계와 기술 용역을 맡았던 일본의 유명 업체는 콘크리트댐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에 의문을 가졌습니다. 비용도 비쌀 뿐더러 지형 특성에 맞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철근과 시멘트 대신 주변에 널린 모래와 자갈을 대안으로 내놓았습니다. 전 세계 댐 건설 자료를 검토한 뒤 세계적인 추세가 모래와 자갈로 만든 사력댐이라는 것을 알아냈고, 이 방식이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공사 현장 암반에 더욱 적합하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입니다. 결국 일본 업체는 재조사를 통해 사력댐이 최선이라는 것을 인정했고, 이로써 국가 예산 30%를 절감하며 댐을 성공적으로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정 선대회장의 업적으로 서산 천수만 간척사업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식량 증산 및 자급률 제고 등을 위해 충남 서산 천수만에 간척 농지를 만드는 사업으로, 물살이 거세 긴 방조세 사이를 잇는 마지막 작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가 생각해낸 방법은 폐 유조선을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방조제 사이에 22만 6,000톤 급의 대형 유조선을 가라앉혀 물의 흐름을 잠시 멈추게 하고, 그곳에 모래와 흙을 부어 막았습니다.
이를 통해 서산 간척지 사업이 무탈하게 마무리됐고, 김제평야보다 넓은 땅을 확보할 수 있게 됐습니다. 또한 공사 기간 3년 단축, 공사비 290억 원 절감이라는 토끼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른바 ‘정주영 공법’으로 불리는 기발한 발상을 통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낸 것입니다. 서산 간척지 공사가 한창이던 1983년, 선대회장은 한 언론사의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인간이 스스로 한계라고 규정짓는 일에 도전하여 그것을 이루어내는 기쁨을 보람으로 기업을 해왔고, 오늘도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
정 선대회장은 한국 경제 발전과 함께한 기업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일에도 그 누구보다 적극적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는 신념 하에 자신의 호인 ‘아산’을 딴 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하고 교육, 의료 등의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냈습니다. 그의 뜻을 이어받은 아산사회복지재단은 아산병원으로 대표되는 의료를 비롯해 장학, 복지, 학술 연구 등의 사업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정 선대회장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과 개척 정신으로 자동차뿐만 아니라 건설, 철강, 조선 등의 산업을 일으키며 한국을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이끌었습니다. 현대차그룹은 정신적 지주인 정 선대회장의 철학과 신념을 계승해 변화하는 산업 환경에서 도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정신과 통찰력은 4차 산업혁명으로 급변하는 지금의 시대까지 관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대한 꿈과 긍정적인 청사진을 가지고 미래를 내다 보아야 한다. 모든 일에 항상 열심히 노력하는 이는 ‘좋은 때’를 결코 놓치지 않아 도약의 뜀틀로 쓰고, ‘나쁜 때’도 때가 나쁘다고 기죽는 대신 눈에 불을 켜고 최선을 다해 수습하고 비켜가고 뛰어넘어 다음 단계의 도약을 준비한다. 그러므로 일에 임할 때 날마다 계획을 짜고, 또 매달 계획을 세우고, 매년 계획을 세우면서 생활해야 발전이 있다.”
정 선대회장의 서거 20주기를 맞아 3월 22일부터 종로구 계동의 현대건설 본관 1층 로비에서 추모 사진전이 진행 중입니다. 4월 2일까지 열리는 이번 사진전은 인트로를 비롯해 도전, 창의, 혁신, 나눔, 소통 등 5가지 주제로 구성됐습니다. 부문 별로 주요 업적이 담긴 사진을 비롯해 정 선대회장의 어록 등이 전시됩니다. 각 부문 주요 전시물과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인트로
전시는 청년 정주영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고향인 강원도 통천에서부터 더 큰 모험을 위해 서울로 갓 상경했을 때까지, 젊고 열정 넘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전시되는 여러 장의 사진에는 형제 및 사촌, 그리고 어머니 등 가족들의 모습도 담겨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기 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전·창의·혁신·나눔·소통
이 섹션에선 정 선대회장이 자동차, 건설, 조선, 제철 등 다양한 산업에 남긴 주요 업적을 도전·창의·혁신으로 분류해 LED 사진으로 전시합니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던 복흥상회에서 일하던 때를 비롯해 현대자동차공업사 창업 1주년 기념 사진과 야유회 사진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현대건설 신화의 시작이었던 미군 공사 계약서에 사인을 하던 순간과 울산조선소 건립을 위해 차관을 마련하러 갔던 순간도 있습니다. 완성차 신차 발표회, 서산 간척지 공사 때의 모습과 더불어 88 서울올림픽 유치에 힘썼던 모습도 담겨있죠. 나눔과 소통 부문에서는 나눔 사업 소개, 그리고 이와 관련된 정 선대회장의 주요 어록이 엽서 형태로 전시됩니다.
체험 전시물
한국 경제 발전을 이끈 정 선대회장의 집무실을 재현한 전시물도 있습니다. 중대한 결정을 내렸던 자리를 간접적으로 경험해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또한 집무실의 창문에서 바라봤던 사계절의 경치를 타임랩스 기법으로 되살려 더욱 생생한 체험이 가능합니다. 이와 함께 그의 염원이 담긴 제품의 과거와 미래를 함께 볼 수 있는 체험 전시물도 마련됩니다. 바로 현대차의 첫 고유 모델인 ‘포니’와 이에 영감을 받아 개발된 콘셉트카 ‘EV 콘셉트 45’입니다.
참고로 이번 사진전은 온라인에서도 진행됩니다. 3월 21일부터 9월 20일까지 총 6개월 동안 ‘아산정주영닷컴(www.asan-chungjuyung.com)’ 에서 운영됩니다. 정 선대회장의 연대기와 사진 및 영상을 통해 삶에 대한 그의 정신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진.김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