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14 현대 모터스포츠팀
레이싱 팀의 형태는 크게 자동차 제조사가 직접 운영하는 ‘워크스 팀’과 개인이 운영하는 ‘프라이빗 팀’으로 나눈다. 워크스 팀이라면 당연히 자동차 제조사가 경주차를 직접 개발한다. 그렇다면 프라이빗 팀은? 스스로 만들기도 하지만 외부에서 구입하기도 한다. 이런 수요를 위해 포뮬러부터 투어링카, 랠리카 등 다양한 경주차를 판매할 목적으로 제작하는 전문 회사도 존재한다.
자동차 메이커가 직접 경주차를 제작해 판매하는 케이스도 있다. 요즘 흔하게 볼 수 있는 형태로, 레이싱팀이 자동차 제조사의 고객이 되기 때문에 ‘커스터머 레이싱’이라고 부른다. GT 시리즈는 물론이고 투어링이나 랠리로 눈을 넓히면 생각보다 많은 자동차 제조사들이 경주차를 판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2년 독일에 모터스포츠 전진기지를 설립한 현대자동차는 WRC 활동과 병행해 커스터머 레이싱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여기에는 WRC 하위 클래스용 i20 R5 랠리카 외에 서킷 투어링 경주차인 i30 N TCR도 있었다. 당시 현대차는 모터스포츠 업계에서 지명도가 비교적 낮은 상태였지만, WRC에서의 활약과 경주차의 뛰어난 성능으로 큰 호평을 받았다. 현재 현대팀은 수많은 프라이빗 팀 및 드라이버들과 함께 전 세계 각지의 랠리와 TCR 시리즈에서 우승 기록을 쌓아가고 있다. 올해는 TCR 클래스 신차인 엘란트라(아반떼) N TCR을 투입하기 시작하는 한편, 올해 하반기부터 i20 N을 기반으로 새롭게 도입되는 랠리2 규정용 신차 준비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물론 2021년 상반기에도 인상적인 성적을 거두고 있다. 가령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랠리 격전지 중 하나인 이탈리아 랠리 시리즈(Rally Campionato Italiano) 개막전인 ‘랠리 델 치오코 에 발레 델 세르키오(3월 12~13일)’에서는 i20 R5로 출전한 현대 워크스 팀의 티에리 누빌(Thierry Neuville)이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워크스 팀 선수가 적응 훈련을 위해 소규모 랠리에 출전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니다. 특히나 올해 코드라이버를 교체한 누빌은 많은 실전 훈련이 필요하다. i20 R5는 이번 랠리에 모두 5대가 출전했으며, 10개의 SS 가운데 8개에서 톱 타임을 기록하는 등, 압도적인 성능을 보였다. 제2전 랠리 산레모(4월 10~11일)에서도 현대팀 소속의 크레이그 브린(Craig Breen)이 우승했다. 올해 이탈리아 현대팀으로 이적한 안드레아 크루놀라(Andrea Crugnola)는 지난해 이탈리아 챔피언으로, 개막전에서 머신 트러블로 고전했지만 산레모에서 종합 2위에 올랐다.
이탈리아 각지에서 열린 다양한 랠리 이벤트에서도 현대 마크를 단 경주차 팀들에게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3월 27~28일 랠리 델라 발 도르시아에서는 지아코모 코스테나로(Giacomo Costenaro)가 종합 우승을 차지했으며, 4월 16~17일의 랠리 엘바에서는 BRC 레이싱의 루카 로제티(Luca Rossetti)가 종합 2위에 올랐다. 이탈리아 그레블 시리즈 개막전인 랠리 아드리아티코(4월 23~24일)에서도 움베르토 스칸돌라(Umberto Scandola)가 우승했다.
아울러 스페인의 타막 랠리인 비야 데 산타 브리지다(3월 19~20일)에서는 현대 경주차를 타는 안토니오 폰체(Antonio Ponce)가 포르쉐 911(타입 997)로 2위를 거둔 이반 아르마스(Ivan Armas)보다 23.9초 앞서며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포르투갈 랠리 시리즈의 개막전인 ‘랄리 테라스 다보보레이라’에서는 올레-크리스티앙 베이비(Ole-Christian Veiby)가 종합 우승, 포르투갈 현대팀의 브루노 마갈레스(Bruno Magalhaes)가 7위에 올랐다. 포르투갈 북부 아마란테에서 열린 개막전은 SS 합계 100.87km의 그레블 랠리였다. 베이비는 2위인 페페 로페즈(Pepe Lopez, 스코다 파비아 랠리2 에보)와 시차 2.8초의 치열한 접전 끝에 우승컵을 손에 넣었다. 베이비는 지난해에 이어 현대 주니어 프로그램에 선정된 프랑스 드라이버다. 현대팀은 커스터머 레이싱 주니어 드라이버 프로그램을 통해 젊고 유망한 선수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참고로 핀란드 랠리 챔피언십의 개막전이었던 아크틱 라플란트 랠리(1월 14~16일)에서 현대 WRC2 소속의 올리버 솔베르크(Oliver Solberg)가 3위에 올랐다. WRC 챔피언을 아버지(페터 솔베르크)로 둔 2세 드라이버 올리버는 현대팀의 주니어 드라이버 프로그램을 통해 차세대 WRC 스타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3월 5~6일 열린 시리즈 제2전 ‘SM O.K.오토 랠리’에서는 리쿠 타코(Tahko Riku)가 3위에 올랐다. 2위와의 시차는 불과 6.6초. 현대 커스터머 프로그램 최초로 핀란드 드라이버의 포디엄 등극이었다. i20 R5는 소형차를 사용하는 유럽 스타일의 랠리가 다소 생소한 미국에서도 활약 중이다. 2월 20일 미국 스노·드리프트 랠리(SNO·Drift Rally)에서 엔다 맥코맥(Enda McCormack)이 클래스 우승과 함께 종합 6위에 올랐고, 미주리주에서 이어진 100 에이커 우드 랠리에서는 클래스 2위(종합 7위)를 차지했다.
현대자동차 모터스포츠 활동의 또 하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것이 서킷용 투어링 경주차인 TCR 클래스다. 서킷 경기는 대체로 랠리보다 개막이 늦지만, 북미의 사정은 다르다. 가령 미국의 IMSA 미쉐린 파일럿 챌린지의 경우 1월 22~24일 데이토나 인터내셔널 스피드웨이에서 개막전을, 3월 18일 세브링에서 2전을 치렀다. 미쉐린 파일럿 챌린지에서는 브라이언 허타 오토스포츠의 벨로스터 N TCR이 개막전 4위, 2전 3위로 포인트 종합 선두를 달리고 있다. 마이클 존스 레이싱(벨로스터 N TCR)은 3위이며, 가장 먼저 실전에 투입된 엘란트라 N TCR(브라이언 허타 오토스포츠)은 7위를 기록하고 있다.
데이토나와 비슷한 시기에 남반구 호주에서도 TCR 시리즈가 개막했다. 지난 1월 24~26일 시몬스 플레인즈 레이스웨이에서 열린 1라운드에서 HMO 커스터머 레이싱의 조시 부챈(Josh Buchan)이 3위(레이스2)로 무난하게 첫 단추를 끼웠다. 부챈은 시드니 모터스포츠 파크에서 열린 4라운드 3연전에서 2번의 우승을 차지하며 종합 2위 루크 킹(Luke King)을 11점 차이로 바싹 추격하고 있다. 같은 팀의 나단 몰컴(Nathan Morcom)은 2라운드와 4라운드에서 포디엄에 올라 종합 4위를 기록하고 있다.
옆 동네인 뉴질랜드에서도 현대 경주차의 활약이 빛났다. 4월 23~24일 하이랜즈 모터스포츠 파크에서 열린 개막 3연전에서 진 랜슬리가 1, 2경기 연속 2위를 차지했고, 3경기에서는 헤이든 패든(Hayden Paddon)이 우승, 제이든 랜슬리(Jaden Ransley)가 2위로 더블 포디엄이었다. 패든은 현대팀의 전 WRC 드라이버로 현재는 고향인 뉴질랜드로 돌아가 각종 랠리와 서킷 경기에 출전하고 있다.
TCR 유럽은 유럽 대륙에서 펼쳐지는 TCR 시리즈다. 축구에 비교하자면 WTCR은 월드컵, TCR 유로 2020랄까. 모터스포츠 역사와 인기를 자랑하는 유럽답게 TCR 유럽은 WTCR에 못지않은 치열한 격전지다. 올해는 5월 7~9일 슬로베키아를 시작으로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7개국에서 14개 라운드를 펼친다.
이번 시즌 TCR 유럽에서의 현대 커스터머 세력은 WRC 챔피언이 이끄는 프랑스의 세바스티앙 로브 레이싱(SLR)과 체코의 야닉 모터스포츠다. 그중 SLR에 신차 엘란트라 N TCR이 공급되었다. 기대에 부응하듯 SLR의 메디 베나니(Mehdi Bennani)는 레이스 2에서 폴투윈을 차지했다. 베나니는 지난해 TCR 유럽 시리즈에서 우승 한 번 없이도 시즌 챔피언에 올랐던 모로코 출신의 베테랑 드라이버다. 레이스2 폴 포지션에서 출발한 베나니는 미켈 아즈코나(Mikel Azcona)의 압박을 끝까지 막아내 우승을 따냈다.
4월 25일 실버스톤에서 열린 TCR 영국 개막전은 현대 커스터머 세력이 장악했다. 예선 폴 포지션의 맥스 허트(Max Hart, 맥시멈 모터스포츠 위드 모투스 원 레이싱)가 레이스 1 우승을 차지했고, 이어진 레이스 2는 최고속 랩을 기록한 루이스 켄트(Lewis Kent)가 가져갔다. 에섹스 & 켄트 모터스포츠 소속의 루이스 켄트 역시 허트와 마찬가지로 i30 N TCR을 탄다.
VNL에서 이름을 바꾼 독일 뉘르부르크링 내구 시리즈(Nurburgring Langstrecken Series)에서도 신차 엘란트라 N TCR의 승전보가 전해졌다. 뉘르부르크링 내구 시리즈는 뉘르부르크링 24시간의 차종과 클래스를 공유하는 4~6시간 레이스를 시리즈로 묶은 것이다. 이름은 다르지만 전부 뉘르부르크링에서 열리며, 5월 1일 제3전에 엘란트라 N TCR로 출전한 마뉴엘 라우크(Manuel Lauck)와 마크 베셍(Marc Basseng) 조가 클래스 우승을 차지했다. 2위인 루브너 모터스포츠의 오펠 아스트라와 거의 1랩 차이였다. 현대 모터스포츠 N 로고를 박은 타겟 컴페티션은 사실상 6월에 있을 뉘르부르크링 24시간의 준비작업이나 마찬가지였다.
뉘르부르크링이라면 누구나 24시간 레이스를 먼저 떠올린다. 5월 9일에는 이 대장정의 전초전이 있었다. 결승 경기 한 달 전 열리는 예선전은 장거리 테스트를 겸해 6시간이나 달리기 때문에 ‘퀄리파잉 레이스’(Qualifikationsrennen)라고 부른다. 오래된 노르트슐라이페와 F1이 열리는 GP 슈트레케를 연결한 풀코스는 평소에 달려 볼 기회가 많지 않아 본선 시뮬레이션이라는 측면에서도 소중한 기회다. 따라서 팀마다 세팅 데이터 확보와 코스 적응을 위해 총력전을 펼친다. 이번 퀄리파잉에선 현대 워크스 팀의 i30 N TCR이 쿠프라 레온을 누르고 클래스 우승을 차지해 본선 전망을 밝게 했다. 한편, 엘란트라 N TCR은 불의의 사고로 리타이어했지만, 결승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칠 것으로 기대된다.
2015년 공식 출범한 현대차의 커스터머 레이싱 부문이 벌써 5년 차를 맞았다. WRC에서 두 번의 제조사 우승을 차지하며 증명한 높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프라이빗 팀을 위한 경쟁력 높은 R5 랠리카와 서킷용 TCR 경주차를 개발하고 있다. 요즘은 내년부터 R5를 대체하게 될 랠리2 규정용 신차 i20 N 랠리2를 준비 중이다. 아울러 TCR 클래스에서는 지난해 공개한 신차 엘란트라(엘란트라) N TCR이 서서히 역량을 드러내고 있다. 세팅 데이터가 쌓이면 얼마나 더 뛰어난 성과를 거둘지 기대된다.
글. 이수진 (자동차 평론가)
1991년 마니아를 위한 국산 자동차 잡지 <카비전> 탄생에 잔뜩 달아올라 열심히 편지를 보냈다가 덜컥 인연이 닿아 자동차 기자를 시작했다. 글 솜씨 없음을 한탄하면서도 미련을 놓지 못한 것이 벌써 27년이다. <카비전> 편집장을 거쳐 현재는 <자동차생활> 편집장으로 재직 중이다. 전기차와 커넥티드카, 자율주행 기술 같은 최신 트렌드를 열심히 소개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름 냄새 풍기는 내연기관 엔진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자동차 덕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