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되짚어 보는 것은 그동안 밟아 온 자취를 정리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미래 방향을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지난 2013년 발간한 서적 〈남양연구소 발전사〉를 통해 그간 쌓은 R&D 역사 및 성과를 정리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글로벌 자동차 산업의 미래에 대비하겠다고 다짐했다. 지금까지 쌓아온 성과가 미래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미래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자세를 가다듬고자 그동안의 성장 과정을 돌아본 것이었다.
특히 해당 책에 기술된 이야기 중 현대차가 본격적으로 기술을 정립한 고유모델 개발과 관련된 내용은 전동화 시대를 맞이한 현재 시점에서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자체 기술을 확보하고 이를 발전시킨 과정을 살피면서 선진 자동차 제조사로 도약한 현대차그룹의 오늘날 모습이 더욱 값진 결과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 모델 포니부터 자동차의 모든 핵심 구성을 독자적으로 완성한 엑센트까지 이어진 현대차의 기술 내재화 일대기를 〈남양연구소 발전사〉에 기술된 내용을 중심으로 1부에 이어서 소개한다.
현대차는 1985년에 글로벌 수출 전략 차종으로 개발한 포니엑셀을 선보였다. 포니엑셀은 포니의 후속 모델로, 성능과 품질이 뛰어나다는 의미의 ‘Excellent’에서 따온 이름만큼이나 우수한 특징을 갖춘 소형차였다. 당시 세계적인 추세에 맞춰 앞바퀴굴림 방식을 채택한 점이 대표적이다. 포니엑셀의 플랫폼과 파워트레인은 이전처럼 일본 기술을 활용하여 개발했다. 포니, 포터, 스텔라 등을 개발하며 실력을 쌓은 현대차의 차량 설계 기술로 포니엑셀의 종합적인 완성도는 크게 진일보했다. 뒷바퀴에 동력을 전달하는 프로펠러 샤프트가 없던 덕분에 실내 공간이 넓었고, 키가 큰 사람도 편안하게 탑승할 수 있었다. 아울러 고급 승용차에만 적용되던 4륜 독립식 서스펜션을 적용해 불규칙한 노면에서도 승차감이 우수했으며, 소형차에서는 이례적인 *풀도어 설계로 외부 소음 유입이 적었다.
*풀도어 : 차체 측면과 지붕 일부를 덮는 형태의 도어 구조. 도어 프레임과 차체 아우터 패널이 통합된 덕분에 풍절음이 적게 유입돼 실내 정숙성이 높은 장점이 있다.
우수한 안전성도 포니엑셀의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경쟁 모델보다 넓은 휠 트레드 덕분에 고속주행 때도 안정적이었고, 브레이크 유압회로를 X자형으로 설계함으로써 어느 한 쪽 브레이크에 이상이 발생해도 문제없이 제동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고안했다. 또한 연료탱크를 스페어타이어 수납공간 전방에 배치해 후방충돌 시 연료 누출 가능성을 낮췄다.
공기저항을 최소화한 에어로 다이내믹 스타일의 디자인 또한 국내외 시장에서 눈길을 끌었다. 이 역시 주지아로의 손길을 거친 결과물이었다. 여기에 차체 경량화, 엔진 성능 개선 등이 결합한 포니엑셀은 이전 포니보다 연료를 20~30% 더 적게 소모했다.
현대차가 포니엑셀을 통해 거둔 가장 큰 성과는 미국 수출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미국 시장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과거부터 전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차량 안전 법규와 배기가스 규제를 앞세우고 있다. 이로 인해 당시 미국에 자동차를 수출했던 자동차 제조사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 몇몇 브랜드와 일본 브랜드에 불과한 정도였다. 현대차는 포니엑셀의 미국 수출을 위해 북미에서 혹한 테스트와 종합 테스트를 실시했고, 미국 배기가스 규제 인증을 목적으로 미국기술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이런 노력으로 포니엑셀은 1986년 1월 미국 환경보호청(EPA)의 배기가스 환경 인증을 당당하게 통과하며 미국 수출 길에 오른 첫 번째 국산차로 등극했다.
포니엑셀의 미국 수출은 당시 현대차의 기술이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사건이었다. 아울러 이는 우리나라 산업 전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섬유산업 중심의 개발도상국형 수출 구도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된 것은 물론, 기계 산업의 꽃인 자동차를 미국시장에 판매해 우리나라의 기술 수준이 눈부시게 발전했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렸기 때문이다. 포니엑셀은 판매량에서도 고무적인 성과를 기록하며, 미국에 수출한 지 1년이 지난 1987년에만 26만 3,610대가 판매돼 미국 수입 소형차 연간 판매 1위 자리를 차지했다.
현대차는 국내와 수출 시장에서의 판매 우위를 더욱 확고히 다지기 위해 1989년에 소형차 엑셀을 출시했다. 엑셀은 포니엑셀의 후속 모델로 미국 소비자의 요구사항을 세심하게 반영한 점이 특징이었다. 승차감, 핸들링, 트레일러 장착 시험 등의 시험 기준을 북미 기준에 맞춰 상품성을 끌어올렸고 국산 소형차 최초로 전자제어 방식으로 연료를 분사하는 MPi 엔진을 탑재해 경쟁력을 강화했다. 연료를 정밀하게 제어하는 MPi 엔진 덕분에 동급 최고 수준의 가속 성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엑셀 개발에서 거둔 성과 중 하나는 디자인 개발 분야였다. 쏘나타(Y2)와 유사한 엑셀의 패밀리룩 디자인은 현대차 디자인실에서 직접 개발한 것으로, 유선형의 당대 최신 스타일을 자랑했다. 이는 현대차의 디자인 개발 역량이 무르익었음을 의미했다. 엑셀은 미국 소비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안전성도 돋보였다. 안전벨트 미착용 경고 장치, 도어 열림 경고 장치 등을 적용해 운전자의 주의력을 높인 점 등이 이를 뒷받침했다. 또한 엑셀은 1991년 미국도로교통안전국(NHTSA)의 충돌시험에서 경쟁 모델을 제치고 안전성 평가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처럼 우수한 상품성에 바탕한 엑셀은 국내 단일 모델 최초로 1991년 7월 누계 생산 200만 대를 돌파해 포니엑셀이 일으킨 판매 신화를 이어갔다.
현대차는 엑셀 출시 시점을 전후로 대량 생산 체제 구축과 엔진 개발 계획을 세웠다. 1988년 4월에는 울산에 30만 대 규모로 제2공장을 준공해 생산 능력을 연간 75만 대로 확장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로도 늘어나는 주문량을 소화할 수 없게 되자, 1990년 9월에 35만 대 규모의 제3공장을 추가로 세우고 연간 100만 대 생산 시대에 돌입했다. 참고로 제3공장은 프레스 및 차체 공장의 자동화율 90% 이상, 국산화율 90%에 달하는 당시 최고 수준의 첨단 공장이었다.
1980년대에 포니2, 스텔라, 포니엑셀 등 다양한 고유 모델을 개발한 현대차는 차체 설계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그러나 해외 자동차 제조사와 대등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엔진, 변속기 등의 분야에서도 기술력을 높여야 했다. 이에 현대차는 1983년 9월 ‘엔진개발실’을 발족하고, 소형차에 탑재 가능한 독자 엔진을 개발하는 ‘알파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소형차는 당시 현대차의 주력 차종으로 엔진 수요 또한 가장 많았다.
알파 프로젝트는 현대차의 기술 내재화에 있어 아주 중요한 포인트로 작용했다. 알파 프로젝트에서 쌓은 엔진 개발 노하우 및 기술은 발전을 거듭하며 베타, 델타, 감마, 세타, 람다 등 수많은 자체 엔진이 탄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알파 프로젝트는 엔진 기본 개념 설계를 영국의 기술 컨설팅 업체인 리카르도와 함께 진행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나라의 가공, 주조, 소재 기술 수준이 뒷받침되지 못한 탓에 리카르도와 함께 개발한 기술로는 바로 양산에 착수하기 어려웠다.
이에 현대차는 외국 기술 자료를 추가로 수집하고 분석에 필요한 시험의 구체적인 내용과 절차, 그리고 개선 방안을 찾았다. 엔진 시제품 약 300기와 시험 차량 150대를 만들어 혹서 기후의 미국 애리조나와 혹한 기후의 캐나다 온타리오에 투입했고, 이곳에서 지구 105바퀴에 해당하는 총 420만 km의 시험 운전을 거쳐 내구성을 검증했다. 이렇듯 수많은 시험과 세 차례에 걸친 완전 수정 끝에 완성한 알파 프로젝트의 결과물 ‘알파 엔진’이 1991년 공개됐다.
알파 엔진은 1.5L급 3밸브 MPi 기술을 채택한 첨단 엔진으로 파워트레인 분야에서 현대차가 거둔 기념비적인 성과였다. 알파 엔진은 성능 또한 우수했다. 알파 엔진을 탑재한 스쿠프의 0→ 100km/h 가속 시간은 당시 일본산 경쟁 모델보다 0.6초 빠른 10.4초에 달했다(자연흡기 기준). 또한 시속 60km 주행 시 20.2km/L의 효율을 달성해 해외 경쟁 모델의 19.4km/L를 앞섰다. 알파 엔진 개발에서 얻은 기술적 도약은 엔진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고 현대차 각 부문의 기술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알파 엔진 개발 과정에서 주조, 가공, 공작 등 모든 분야의 기술 수준이 크게 향상된 것이다.
1994년 출시된 엑센트는 디자인은 물론 엔진, 변속기, 플랫폼에 이르는 핵심 구성을 현대차가 순수 독자 기술로 완성한 첫 차였다. 자체 개발한 플랫폼에 자체 개발 엔진을 탑재한 최초의 국산차이기도 했으며, 현대차의 높은 개발 역량을 국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포니에서 이어져 온 현대차의 기술 혁신이 그 직계 후속 모델인 엑센트에서 열매를 맺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컸다. 이는 현대차가 부품 국산화율을 높이는 데 그치지 않고 주요 설계 기술을 모두 내재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였다.
현대차는 그간 두터워진 개발 노하우를 바탕으로 엑센트를 완성했다.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보다 더욱 엄격한 자체 평가 기준을 도입해 차량의 품질과 내구성을 끌어올리는 한편, 90억 원에 달하는 슈퍼컴퓨터를 도입해 공기역학, 충돌 해석 등의 시뮬레이션을 진행한 점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국산 소형차 최초로 에어백, ABS를 옵션으로 마련하고 고장력 강판과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을 확대 적용해 경량화를 구현했다. 엑센트는 디자인 개발 측면에서도 한 단계 진전을 이뤘다. 디자인 콘셉트 단계에서 스포티 세단, 새로운 비례, 클린 보디 스킨, 패널과 빛의 조화 등 글로벌 트렌드를 반영했고, 컴퓨터 스타일링도 이때 처음 시도했다.
엑센트는 현대차가 자체 개발한 알파 엔진과 변속기를 탑재해 의미를 더했다. 알파 엔진은 기존 엑셀 엔진 대비 최고출력과 최대토크가 각각 10마력, 0.8kgf·m 이상 향상돼 종합적인 주행 성능을 끌어올렸다. 1997년 현대차는 엑센트의 엔진 라인업 강화를 통해 폭넓은 엔진 기술력을 보여주었다. 3밸브 SOHC 알파 엔진을 개량해 개발한 1.5 DOHC 알파 엔진을 도입해 소형차의 DOHC 시대를 열었고, 연료 절감형 린번 엔진으로 경제성이 중요해진 당시 우리나라의 시대적인 요구에도 부응했다.
참고로 린번 엔진은 저부하 운전 시 연료 혼합비 22:1(정상 혼합비 14.7:1)의 희박 연소를 통해 효율성을 높인 점이 특징으로, 기존 대비 효율이 20% 이상 우수한 18.9km/L의 연비를 실현했다. 더불어 탄화수소 76%, 일산화탄소 80%, 질소산화물 52%, 이산화탄소 16%를 감소시킨 린번 엔진은 1999년 [IR52 장영실상]
엑센트는 미국 언론 매체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1995년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는 ‘현대차 엑센트, 드디어 웃다’라는 제목의 자동차 특집판 기사에서 현대차를 새로 평가하게 만드는 엑센트라고 보도했다. 이들은 “미국과 일본 자동차 제조사가 한국인들에 의해 엉덩이를 걷어차일 것”이라는 언급과 함께 현대차와 엑센트의 경쟁력을 호평했다. 포니엑셀로 진출한 미국 시장에서 단 10년 만에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이후 세대교체를 거듭하며 경쟁력을 키워 온 소형차 라인업은 현대차의 글로벌 경영을 뒷받침하는 토대가 되어왔다. 2008년 엑센트의 계보를 잇는 소형차 베르나(수출명 엑센트)가 미국의 소비자 조사 기관인 J.D. 파워(J.D. Power)의 내구품질조사(Vehicle Dependability Study, VDS)에서 소형차 부문 1위를 차지하며 당시 현대자동차그룹 차종 중 가장 높은 성적을 기록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참고로 2022년 신차품질조사(Initial Quality Study, IQS)에서도 엑센트가 동급 최고 자리에 오르는 등 J.D. 파워의 다양한 차량 품질 조사에서 현대차 소형차 라인업은 뛰어난 경쟁력을 꾸준히 입증하는 중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현대차는 포니를 시작으로 커다란 기술적 성취를 이뤄왔다. 특히 포니, 포니엑셀, 엑셀, 엑센트로 이어진 소형차 역사에서는 라이선스 모델을 조립 생산하던 것에서 벗어나 독자 모델을 개발하고 이후 종합 자동차 제조사로 완전한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달려온 현대차의 기술 개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현대차가 오늘날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퍼스트 무버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기술 개발과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현대차의 열망은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전망이다.
글. 이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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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기술 내재화 일대기 1부] 포니에서 시작된 독자 기술 확보의 길HMG 저널 운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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