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2 현대자동차그룹

도시 경쟁력을 높이는 엑스포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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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포 개최지는 보통 엑스포 개최를 통해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는다. 또한 막대한 인프라 구축으로 도시 경쟁력이 향상되며 건축, 문화, 경제 분야 역시 눈부시게 변모한다. <상상력의 전시장 엑스포>의 저자 오룡이 엑스포 개최로 도약한 도시들을 소개한다.

엑스포는 그간 개최 도시를 발전시키는 마력의 힘을 발휘해왔다. 에펠탑으로 대표되는 불멸의 유산을 남기는가 하면, 도시계획의 기본 축을 재정립해 도시의 면모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가령 엑스포를 개최한 대다수 도시가 엑스포를 계기로 도로, 철도, 통신, 상·하수도 등을 개선했다. 엑스포가 도시개발, 도시재생 등 도시 전반에 막대한 파급효과를 미친 것이다. 


또한 엑스포 개최 도시는 그 과정에서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고 국제적인 도시로 발돋움한다. 낙후 지역을 재개발한 박람회장은 그 자체로 도시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당대 최고의 거장 건축가들이 창의력을 쏟아부은 박람회장은 근현대 도시건축의 실험장이 되어왔다. 혁신 디자인으로 가득 찬 박람회장은 그 성과를 개최 도시와 공유했다. 

1889년 파리박람회 출입구 겸 상징탑으로 에펠탑이 세워진 샹 드 마르스(출처: https://www.bie-paris.org/)

전시관을 비롯한 엑스포 대부분은 일정 시간 사용하는 한시적 건축물로 지어진다. 즉, 시대를 앞선 진보적, 실험적 건축이 많이 나올 수 있는 환경으로 혁신적인 건축 자재와 건축 기술의 쇼케이스가 돼온 것이다. 이런 박람회장 건축에 동원된 다양한 시도는 새로운 전형으로 도시 건축에 전파되기도 한다. 

오늘날 파리의 거리 모습

그간 엑스포를 통해 눈부시게 변모한 대표적인 도시는 역시 파리다. 1855년 첫 세계박람회 준비 당시 파리는 1851년 엑스포의 효시를 이룬 런던에 비해 도시환경이 크게 낙후돼 있었다. 좁고 꼬불꼬불한 미로 같은 골목, 밀집 형태로 낮에도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건물, 비만 오면 진창이 되는 도로, 생활하수와 오수가 넘치는 수로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한마디로 중세도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정복자 나폴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는 세계박람회를 영국에 선점당한 것을 못내 아쉬워해 즉위하자마자 박람회 개최를 추진했다. 동시에 대대적인 도시 재개발에 착수했다. 이른바 ‘파리 대개조’ 사업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제국의 위세를 강화하려는 패권적 욕망도 숨어있었다. 

박람회 동력으로 이루어진 ‘파리 대개조’

개선문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파리의 도시 설계

런던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나폴레옹 3세는 파리 시장으로 조르주외젠 오스만 남작을 발탁해 도시 구조 개혁 총책을 맡겼다. 오스만 남작은 16년 재임기간 동안 파리의 도로, 건축물, 상·하수도, 녹지 등을 획기적으로 변모시켰다. 빈민구역 철거 등에 따른 사회적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으나 불도저식으로 재개발을 밀어붙였다. 


이 때 개선문을 중심으로 한 12개 방사형 도로가 개설돼 현재 파리 도로의 근간이 됐고, 파리를 남북으로 가르는 리볼리 거리와 동서로 가로지르는 생-미쉘 거리도 함께 만들어졌다. 넓게 뻗은 도로변으로 일정 규격의 신축 건물도 가지런히 들어섰다. 이른바 ‘오스만 양식’의 7층 건물들이다. 물론 도심과 외곽을 잇는 연결 도로와 철도망 또한 크게 확충됐다.

에펠탑과 함께 파리를 상징하는 개선문

장티푸스의 온상이던 비위생적인 하수도는 총 길이 2,400km에 달하는 하수처리 인프라로 발전됐다. 도시 개조는 잇따라 열린 박람회를 동력으로 삼아 나폴레옹 3세 실각 이후에도 지속됐다. 1889년 네 번째 파리 박람회에선 마침내 에펠탑이 세워졌다. 에펠탑은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물 공모에서 박람회장 출입구 겸 상징조형물로 선정됐다. 


그러나 에펠탑은 지금의 위상과 달리 건설 당시에는 큰 논란 거리였다. 파리에 거대한 철제 탑을 세운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프랑스 학계, 언론, 예술계 등 각종 지식인들의 반대가 빗발쳤다. 철골 구조물은 무너질 위험이 있으며, 수려한 파리 풍광에 ‘눈엣가시’가 될 것이란 비판이었다. 급기야 문화예술인들이 단체를 결성해 철탑 반대 성명서를 조직위에 보냈다.

에펠탑의 현재 모습과 1887~1889년의 건설 과정(출처: https://www.bie-paris.org/)

반대 성명서에는 당대의 문호 알렉상드르 뒤마를 비롯한 지식인 300여 명이 서명했다. 언론에선 한 건축기술자의 환상이 낳은 ‘어리석은 바벨탑’이 파리의 이미지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어 “철골은 그 자체로 완성된 건축물이 될 수 없으며 미적 감각과 거리가 먼, 짓다만 앙상한 새장 같은 꼴이 될 것”이라고 깎아내렸다. 


그러나 박람회 조직위와 건축가 구스타브 에펠은 이에 흔들리지 않았다. 아무도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프로젝트를 강력한 의지로 밀고 나갔다. 에펠은 2년간 40명의 설계사를 동원해 세부설계를 완성했다. 그는 결과에 대한 확신을 갖고 비판자들에게 “당신들도 결국 좋아하게 될 것”이라며 반박하곤 했다.

에펠탑 들어선 파리, 유럽의 보석으로 거듭나다

센강에서 바라 본 파리 시내

에펠탑이 완공되자 시민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놀랍게 아름답다, 장엄하다”는 찬사와 함께 “파리 시내를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거대한 공장 굴뚝같다”는 비판도 나왔다. 하지만 에펠의 장담대로 시민들은 곧 이 탑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박람회 관람객들은 너나없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당시 세계 최고 높이 에펠탑(302.6m)에 올라가 보려는 인파가 끊이지 않았다. 박람회 기간 중 입장료 수입만으로 투자 비용을 뽑고도 남을 정도였다. 에펠탑은 조직위가 건설비의 20%를 대고 나머지는 에펠 회사가 조달하되 20년간 운영 수입을 갖는 조건으로 건설됐고, 1910년 철거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명물이 되면서 영구보존 결정이 내려졌다. 

에펠탑은 결국 서구문화의 아이콘이자 엑스포 사상 최고 유산이 됐다. 이 무렵 파리는 에펠탑을 정점으로 한 스카이라인을 완성했다. 1900년 박람회 때는 런던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개통한 파리 지하철을 선보였다. 포르트 드 뱅센~포르트 마이요 간 메트로 1호선이 그것이다. 박람회와 함께 파리는 눈부신 경관을 자랑하는 유럽의 보석으로 거듭났다. 


파리는 19세기에만 11년 간격으로 총 다섯 차례나 세계박람회를 개최했다. 처음엔 우연의 일치였지만 1878년 세 번째 박람회 이후 ‘11년’을 의식하고 주기적으로 엑스포를 유치했다. 당시에는 11년이 과학기술 진보를 반영하기에 적합한 기간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 사이 박람회 관람자 수는 500만 명에서 5,100만 명으로 10배 이상 늘었다. 

1889년 파리박람회 관람객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에펠탑에 올라 파리 시내를 조망하는 모습(출처: https://www.bie-paris.org/)
에펠탑에서 내려다 본 샹 드 마르스

파리는 1937년 한 번 더 박람회를 열어 최다 엑스포 개최 기록을 갖게 됐다. 박람회장은 샹제리제 거리의 임시 건물에서 치른 첫 박람회 이후 모두 ‘엑스포의 명당’인 샹 드 마르스에 조성됐다. 센 강변에 샤요궁, 트로카데로궁 등 기념비적 건축물이 잇따라 들어서며 샹 드 마르스는 세계 관광 1번지가 됐다. 


초기 세계박람회를 개최한 오스트리아 빈, 미국 필라델피아, 벨기에 브뤼셀 등도 박람회를 계기로 도시 구조를 혁신했다. 호주 멜버른의 경우 일찍이 영국 식민지 시절이던 1880년 박람회를 개최해 시골 마을이나 다름없던 곳이 번듯한 도시로 업그레이드됐다. 당시 박람회장은 도심의 빅토리아 칼튼 공원과 박물관으로 남아 있으며,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백악관 모델이 된 ‘화이트 시티’

‘화이트 시티’라 불린 1893년 시카고 박람회장 중앙부 콜로네이드(출처: https://www.bie-paris.org/)

1888년과 1929년에 두 차례 세계박람회를 연 스페인 바르셀로나는 아메리카-카탈루냐 교역 100주년을 기념한 콜럼비아 탑과 박람회장 출입구로 지은 개선문을 불멸의 랜드마크로 남겼다. 몬주익 박람회장에 지은 스타디움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주경기장이 돼 엑스포 명소가 올림픽 시설로 이어지는 선례가 됐다. 


1906년 밀라노박람회는 이탈리아를 유럽 주류경제권에 편입시키고 밀라노를 이탈리아의 경제 수도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스위스 마터호른과 이탈리아 북부를 잇는 길이 19.8km의 셈피오네 터널 개통 효과를 가시화한 것이다. 박람회장은 밀라노 도심 셈피오네 공원에 조성됐고, 유럽의 세 번째 수족관인 아르누보 양식의 석조건물은 아직도 기념물로 남아 있다. 

1929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세계박람회는 ‘산업, 예술, 스포츠’를 주제로 열렸으며, 당시 580만 명의 방문객이 찾았다(출처: https://www.bie-paris.org/)

1893년 박람회를 개최한 미국 시카고는 박람회장 건립에 17년간 심혈을 기울였다. 미시간(Michigan) 호에서 끌어온 인공 수로와 석호 사이에 전시관 14동, 오벨리스크, 기념비, 조각 등을 도열했다. 전통 고딕 양식의 흰 회벽과 대리석 자재를 써 ‘화이트 시티’라 불렸다. 화이트 시티는 이상적 도시의 모범이 돼 이후 미국 도시건축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이런 영향력 덕분에 시카고는 수도 워싱턴DC 심장부인 ‘내셔널 몰’의 롤모델이 되기도 했다. 국회의사당, 링컨 메모리얼, 리플렉팅 풀, 워싱턴기념탑,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 등이 마치 시카고 박람회장을 옮겨온 듯 재현됐다. 현재 시카고 모델은 급격한 산업화로 굴절된 도시의 틀을 되살리는 준거로 평가 받고 있다. 


엑스포 개최지는 대부분 상징조형물과 기념건축물을 품고 있는 기념공원을 조성했다. 뉴욕 유니스피어(1939년), 브뤼셀 아토미움(1958년), 시애틀 스페이스 니들(1962년), 오사카 태양의 탑(1970년), 밴쿠버 사이언스 월드(1986년), 상하이 동방의 관(2010년) 등이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기념물이다. 

부산항국제터미널과 북항 재개발 사업 예정지 일대 모습

2030년 개최를 추진하고 있는 부산에서 엑스포가 열리면 어떤 기념물을 남기게 될까? 현재 검토안은 북항 2, 3부두 터에 건설하는 오페라하우스 옆 이벤트 문화마당에 상징조형물을 조성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다. 바로 옆 5부두 곡물 저장용 사일로 콤플렉스는 전망탑 겸 문화플랫폼으로 재생될 예정이다. 이와 별도로 직경 180m 전망 대관람차 건립도 거론되고 있다. 

유휴지 개발 vs. 도시 재생

초현실적 구조물로 가득 찬 2020년 두바이 박람회장(출처: https://www.bie-paris.org/)

현대 엑스포에서 박람회장 조성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개발에서 빗겨 난 도시 외곽 낙후지역이나 유휴지 및 나대지를 개발하는 방식과 기존 도심부를 재생·재개발하는 방식이다. 몬트리올, 오사카, 상하이, 밀라노, 두바이 등이 전자에 해당된다면 시애틀, 밴쿠버, 세비야 등은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엑스포를 도시 발전의 결정적 동력으로 활용했다는 점은 동일하다. 2015년 엑스포를 개최한 밀라노는 교외의 쇠락한 공단지역을 재활용했고, 이를 대학과 기업 등이 들어설 ‘휴먼 테크노폴리스 과학기술파크’로 재구성해 2024년 문을 열 예정이다. 역대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2010년 상하이 엑스포도 황푸강 양안 낙후 공단지역을 재개발했다. 이를 통해 여느 엑스포의 2~3배 넓이인 523만㎡ 부지를 최첨단 시가지로 탈바꿈했다. 

또한 상하이는 엑스포를 위해 지하철 노선 199km를 증설해 세계 최장 지하철 네트워크(803Km) 타이틀을 갖게 됐다. 박람회장은 중국관 등 영구보존용 랜드마크 건축물과 함께 세계 유일의 국제박람회기구(BIE) 공인 엑스포박물관이 들어서 도시의 자산이 되고 있다. 각종 기반시설에 막대한 투자가 이뤄진 덕분이다. 


리스본은 1998년 엑스포를 계기로 유럽 최장인 17.2km의 ‘바스코 다 가마’ 대교를 건설하고 도심 북동쪽 타호강 주변을 개발했다. 구상 단계부터 도심 확장을 염두에 두고 너비 700m, 길이 5km의 긴 띠 형태로 박람회장을 건립했다. 그 모양 탓에 ‘리본 개발계획’이란 별칭이 붙었고, 지하철 연장 등을 통해 도심을 옮겨놓은 것처럼 계획적인 시가지가 조성됐다. 

상하이 박람회장에 2017년 건립된 세계엑스포박물관(출처: https://www.bie-paris.org/)
‘바스코 다 가마 대교’를 배경으로 한 1998년 리스본 박람회장(출처: https://www.bie-paris.org/)

시애틀은 1962년 엑스포 개최 당시 지은 시설 상당수를 지금껏 사용하고 있다. 가령 우주탐사 주제가 담긴 엑스포 시설물인 185m 높이의 ‘스페이스 니들’은 시애틀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자리잡았다. 이와 함께 시속 100km로 도심을 달리는 모노레일도 시애틀의 대중교통 핵심 인프라로 남아 있다. 


1986년 밴쿠버엑스포도 다운타운 박람회장 조성을 통해 도시 인프라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당시 최첨단 시스템인 무인 경전철 스카이트레인 노선 28.9km 구간이 신설돼 대중교통의 근간이 됐고, 개막식이 열린 BC 플레이스 스타디움은 2010년 동계올림픽 개막식 장소와 폐막식 장소로 활용됐다. 또한 캐나다 플레이스를 비롯한 엑스포 시설들은 관광명소가 됐다. 

바다 쪽에서 바라본 부산 북항 재개발 조감도. 박람회장 활용에 이어 재개발이 완성되면 부산의 새로운 스카이라인을 그리게 된다

유휴지 개발과 도시 재생이라는 두 가지 성격이 중첩된 경우도 있다. 2030년 엑스포 개최 예정지를 북항 재개발과 연계하려는 부산의 계획이 좋은 예다. 노후 항만 부지 개조 활용이란 점에서 유휴지 개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한편, 인근 도심 재개발과 맞물린 도시 재생의 의미도 있다.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웠던 항만에 창의력 넘치는 박람회장이 들어서면 그 자체로 도시 재생 효과가 살아나게 될 것이다. 


부산은 2030세계박람회에 ‘북항시대’라는 비전을 투사했다. 도심권 항만부지를 전면 개조하는 도시 발전전략에 엑스포라는 강력한 추진동력을 얹어 승수효과를 내겠다는 구상이다. 부산의 심장 북항은 산비탈 주택과 항만시설, 그리고 도심 건물이 복잡하게 어울린 이른바 ‘카오스적 경관의 워터프론트’를 자랑한다.

부산항국제터미널 주변으로 북항 재개발 사업이 이루어질 예정이다

이곳에 박람회장이 들어서면 현재 건설 중인 오페라하우스와 장차 지어질 상징조형물, 재개발 건축물들과 함께 새로운 스카이라인을 만들게 된다. 이는 개항 이래 가장 큰 변모로, 부산의 얼굴을 다시 그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북항에 유치를 추진하고 있는 부산엑스포는 도시공간 개조, 인프라 확충 등 하드웨어뿐 아니라 소프트파워 부분에서도 퀀텀 점프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글. 오룡(칼럼니스트)

언론인 출신 작가, 번역·집필가로 인문학·문화·역사 분야 글을 쓰고 있다. 인류문명의 쇼케이스가 돼온 엑스포 역사에 매료돼 온갖 산물의 미시사를 탐구하고 정리했다. 서강대와 동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한겨레신문 기자, 아시아기자협회 사무총장, 국제평화재단 사무국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 <상상력의 전시장 엑스포>(2012) 등이 있다.


HMG 저널 운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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