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WRC는 전체 12전 중 3전 밖에 남지 않았다. 제10전 핀란드 랠리는 이번 시즌 마지막 그래블전이다. 내년부터 새로운 랠리1 규정이 도입되기 때문에 월드랠리카로 치르는 최후의 비포장 랠리이기도 하다. 남은 스페인과 몬자 랠리는 모두 포장도로에서 열린다.
이번 시즌 역시 코로나19 상황이 해결되지 않아 순탄치 않았다. 스웨덴, 칠레, 영국, 일본 랠리는 취소됐고, 핀란드와 이탈리아에서 두 번씩 경기를 치러야 했다. 스웨덴을 대신해 핀란드 북부 로바니에미(Rovaniemi)에서 열린 제2전 아틱(arctic, 북극) 랠리에선 현대 월드랠리팀의 타낙이 시즌 첫 승을 차지했다. 제10전 핀란드 랠리는 같은 핀란드라도 풀 스노 코스인 아틱 랠리와는 완전히 다르다. 랠리 본부가 설치된 이위베스퀼레(Jyvaskyla)는 핀란드 중남부에 위치하며 계절상 눈도 없다. 크고 작은 호수가 수없이 펼쳐진 까닭에 ‘1000개의 호수 랠리(1000 Lakes Rally)’라는 명칭으로 더 유명하다.
핀란드 랠리는 1951년 몬테카를로 랠리의 지역 예선 성격으로 시작됐다. WRC와는 개최 첫해인 1973년부터 함께 해왔다. 70년의 긴 역사는 물론, 인기 면에서도 첫손에 꼽힌다. 지난해 코로나19 펜데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취소됐던 핀란드 랠리의 복귀에 많은 팬들이 기뻐했다. 그런데 여름에 열리던 지금까지와 달리 올해는 가을에 개최된다. 핀란드 랠리가 10월에 열린 적이 없다 보니 무엇이 달라질지에도 관심이 모아졌다. 차가워진 날씨에 숲은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게다가 이 시기 핀란드에는 비가 심심치 않게 내리기 때문에 각 팀은 날씨 예보에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한여름 백야 기간을 벗어난 만큼, 일몰 후 완전히 어둠 속을 달려야 한다는 점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부분이다.
핀란드 랠리는 경기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노면은 흙바닥이지만 거친 돌이나 큰 장애물이 적고 코너가 완만하기 때문이다. 핀란드 랠리에 ‘랠리계의 그랑프리’ 또는 ‘그래블 그랑프리’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다. 2016년 크리스 미크가 기록한 평균속도(126.62km/h)는 WRC 역사상 가장 빠른 경기 기록이다. 빠른 만큼 실수를 만회할 여유도 없다. 빠른 페이스와 더불어 점프와 블라인드 코너가 많다 보니 정밀한 페이스 노트 작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번 시즌에는 유독 코드라이버 교체가 많았던 까닭에, 핀란드 랠리는 새로운 파트너십을 확인하는 시험대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
막판 뒤집기를 노리는 현대팀에게 핀란드는 다소 부담스러운 어웨이 경기나 다름없었다. 도요타가 2017년 WRC에 복귀하면서 핀란드에 전진기지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팀 체제가 많이 개편되었다지만 도요타에게 핀란드는 여전히 홈그라운드다. 랠리카 개발 작업 역시 핀란드에서 진행하는 만큼, 세팅 노하우가 풍부할 수밖에 없다.
현대팀에서는 티에리 누빌(Thierry Neuville)과 오트 타낙(Ott Tanak), 크레이그 브린(Craig Breen)을 엔트리했다. 드라이버 선수권 포인트 130점의 누빌은 오지에와 50점 차 3위다. 빡빡하기는 하지만 아직 포기하기에 이르다. 챔피언십 5위의 타낙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모국인 에스토니아는 핀란드와 스테이지 특성이 매우 흡사해 2018년과 2019년에 우승하는 등 강한 면모를 보여 왔다. 현대팀 3번째 차의 스티어링 휠은 에스토니아와 벨기에에서 연속 2위에 올랐던 크레이그 브린이 잡았다. 브린은 핀란드 랠리에 10번이나 출전한 베테랑이다.
WRC2 클래스에서는 야리 후투넨(Jari Huttunen)과 올리버 솔베르그(Oliver Solberg)가 신형 i20 N 랠리2의 실전 테스트를 이어간다. 월요일 사전 테스트에서 전복 사고를 당한 후투넨의 차는 독일 알제나우에서 부품을 공수해 복구 작업에 들어갔다. 솔베르그 역시 레키(recce, 탐색 주행) 중 사고가 있었다. 다행히 부상은 없었고, 별도의 차를 사용했기 때문에 경기에는 지장이 없다. 사실 사고보다는 코드라이버 교체가 불안 요소다. 솔베르그는 최근 아론 존스턴(Aaron Johnston)과 결별하고 스바루 USA에서 함께 뛴 경험이 있는 크레이그 드류(Craig Drew)를 옆자리에 앉히기로 했다.
도요타는 감독인 라트발라(Jari-Matti Latvala)와 선수인 칼리 로반페라(Kalle Rovanpera)는 물론 랠리카인 야리스 WRC 역시도 핀란드 출신으로 봐야 한다. 사실상의 홈 경기를 치루게 된 도요타는 챔피언십 포인트 1, 2위인 세바스티앙 오지에(Sebastien Ogier)와 엘핀 에번스(Elfyn Evans), 그리고 그리스 우승으로 기세가 오른 로반페라를 엔트리했다. 코드라이버가 없어 강제로 휴식했던 다카모토 가츠타(Takamoto Katsuta)는 최근 아론 존스톤(Aaron Johnston)을 기용하기로 했다. 또한 도요타는 2017~2018년 도요타 워크스 드라이버였던 에사페카 라피(Esapekka Lappi)를 불러들여 RTE-모터스포츠를 통해 5번째 야리스 월드랠리카를 투입했다. 오지에가 올해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결정(일부 경기 참전은 가능)함에 따라 도요타는 이처럼 새로운 드라이버 라인업을 테스트하고 있다. 한편, M-스포트 포드에서는 거스 그린스미스(Gus Greensmith)와 아드리안 포모(Adrien Fourmaux)가 출전했다. 포모는 최근 코드라이버 레노 자무(Renaud Jamoul)와 결별하고 알렉산더 코리아(Alexandre Coria)와의 파트너십을 발표했다.
3일로 축소된 경기 첫날. 참가자들은 금요일 오전에 4.04km의 테스트 스테이지를 달리며 가을 핀란드를 탐험할 마지막 준비 작업에 힘썼다. 쉐이크다운 테스트에서 타낙과 브린이 각각 1, 2위를, 누빌은 4위를 차지하며 현대팀은 좋은 페이스를 보였다. 그리고 오후 1시 30분경, 이위베스퀼레 시내에 마련된 SS1 할유(Harju)에서 경기가 시작했다. 축구장과 공원 주변을 달리는 2.31km의 단거리 복합 스테이지에는 많은 랠리 팬들이 모여들어 2년 만에 복귀하는 핀란드 랠리를 즐겼다.
이후 핀란드 랠리는 서쪽에 위치한 12.31km의 SS2 아사마키(Assamaki)에서 본격적인 고속 그래블 스테이지에 돌입했다. 예년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린 아사마키는 테크니컬하지만 평균 속도는 높다. 21.37km의 SS3 살로넨-목시(Sahloinen-Moksi)는 드라마틱한 고저차와 함께 막판에 스릴 넘치는 연속 코너가 포진해 있다. 각 팀은 타이어를 교체한 후, 아사마키와 살로넨-목시를 반복해 달린 뒤 남쪽의 SS6 오이틸라(Oittila, 19.75km)에서 금요일을 마감했다.
경기 초반에는 현대팀의 타낙과 브린이 앞줄로 나섰다. SS2 2위로 선두에 오른 타낙은 이어진 SS3를 가장 빠르게 달려 2위 브린과의 시차를 조금씩 벌렸다. 오랜만에 월드랠리카에 탄 라피는 3위. 누빌은 에번스, 로반페라의 도요타 세력에 이어 6위이며, 깨끗해 보이는 노면임에도 실제로는 청소 부담이 컸다는 오지에는 7위다. SS1 톱타임으로 상큼하게 스타트를 끊었던 가츠타는 SS2 고속 코너에서 스핀하며 뒤로 밀렸다.
오후 5시를 넘어 시작된 SS4와 SS5는 타낙과 브린이 사이좋게 톱타임을 나눠 가졌다. 브린은 어둠 속을 달린 SS6 오이틸라에서 타낙보다 4.3초 빨랐다. 덕분에 금요일을 마감하는 시점에서 종합 선두가 되었다. 타낙이 2.8초 차 2위로 현대팀이 원투 체제를 이어갔다. SS6에서 가장 빨랐던 에번스는 같은 팀의 라피와 로반페라를 밀어내고 종합 3위로 부상했다. 누빌은 로반페라 23.4초 뒤에서 오지에와 근접전을 펼쳤다.
토요일의 스피드 경쟁은 중부 핀란드 제2의 도시 얌사(Jamsa) 인근에서 펼쳐졌다. SS7~SS15의 9개 스테이지 151.95km는 핀란드 랠리 전체 코스의 절반에 가까운 길이다. SS8과 SS12 파이얄라(Paijala)는 이번 경기 중 가장 긴 22.61km. 카카리스토-하시(Kakaristo-Hassi) 스테이지(SS7/SS11)에는 핀란드 랠리를 상징하는 점프, 오우닌포야(Ouninpohja)가 있다. 수많은 관중이 지켜보는, 비거리 숫자판까지 박힌 대형 점프대는 선수들의 도전정신을 자극한다. 하지만 자칫 착지가 불안정할 경우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아르바야(Arvaja, SS9/SS13) 스테이지는 1994년 이후 무려 27년 만의 WRC 복귀다. 토요일은 4개 스테이지를 오전과 오후에 반복한 후, 어둠이 내린 이위베스퀼레로 돌아와 금요일의 오프닝 스테이지를 다시 달린 뒤 마무리됐다.
토요일 오전 경기를 지배한 것은 에번스였다. 오프닝부터 4개 스테이지를 연속으로 잡으며 종합 선두가 되었다. 2위 브린보단 5.6초, 3위 타낙보단 9.7초 빨랐다. 가츠타는 SS8에서 착지 후 충돌, 로반페라는 SS10에서 흙더미를 들이박고 차가 대파됐다. 이에 따라 라피, 누빌, 오지에가 4~6위, M-스포트 포드의 그린스미스와 포모는 7, 8위가 되었다.
오후에는 4개 스테이지 톱타임을 잡은 타낙이 브린을 제치고 종합 2위로 올라왔다. 그럼에도 에번스와의 시차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건초더미에 부딪혀 보디가 파손된 브린은 공력 밸런스가 무너져 조금씩 뒤처졌다. 그래도 브린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누빌은 착지 데미지로 냉각수가 새어나와 더 이상 경기를 이어갈 수 없었다. 게다가 엔진 손상으로 일요일 파워 스테이지 주행도 어려워 보였다. 드라이버 챔피언십 도전은 사실상 이렇게 다음 시즌을 기약하게 됐다.
SS14 파타요키(Patajoki)를 잡은 에번스는 아슬아슬한 리드를 지키며 토요일을 마감했다. 타낙과 브린이 약 10초씩의 간격을 두고 2, 3위에서 맹렬히 추격했다. 라피는 브린과 25초 차 4위, 오지에는 헬멧 끈을 제대로 묶지 않아 1분 페널티를 받았음에도 누빌의 리타이어 덕분에 5위다. 그리고 그린스미스, 포모가 그 뒤를 이었다. 최근 M-스포트 포드를 떠난 수니넨은 종합 8위이자 WRC2 클래스 선두이고, 현대팀의 후투넨은 종합 11위, WRC2 클래스 3위다.
일요일의 코스는 2019년과 흡사했다. 2개 스테이지를 반복해 달리는 SS16~SS19의 45.74km 구성이다. 파워 스테이지를 겸하는 최종 SS19 루히마키(Ruuhimaki)는 드라마틱한 점프들이 박진감을 더한다. 리타이어했던 도요타의 가츠타와 로반페라가 차를 고쳐 복귀했다.
비교적 도로 폭이 넓은 고속의 라우카(Laukaa, SS16) 스테이지에서 타낙이 톱타임으로 에번스와의 시차를 0.4초 줄였다. 하지만 에번스는 이어진 SS17 루히마키에서 3.5초를 벌어 12.2초 차이로 달아났다. 3위 브린은 교차로에서 약간의 실수가 있었지만 아직 추격자 라피와 20초 넘는 여유가 있다. 단독 5위인 오지에는 무리한 푸시보다는 파워 스테이지 득점에 주력하기로 했다. 라우카를 다시 달린 SS18에서도 에번스가 가장 빨랐고 그 뒤를 타낙, 라피, 브린이 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파워 스테이지를 겸하는 최종 스테이지 뿐. 최대 5점까지 챙길 수 있는 파워 스테이지는 피 말리는 챔피언십 경쟁에서 매우 중요하다. 순위 점수에 파워 스테이지 점수를 더하면 한 경기에서 개인은 최대 30점(25+5), 팀은 최대 52점(25+18+5+4)까지 챙길 수 있다. 파워 포인트는 예전에 드라이버 챔피언십에만 반영되었지만 올해부터 제조사 챔피언십에도 반영된다.
하지만 마지막 이변은 없었다. 에번스가 최종 스테이지까지 잡아 핀란드에서 완벽한 승리를 가져갔다. 대신 타낙 2위, 브린 3위로 현대팀은 더블 포디엄을 차지했다. 오랜만에 월드랠리카로 돌아온 라피는 4위. 오지에, 그린스미스, 포모, 수니넨, 오스트베르그, 린드홀름이 득점권으로 마무리했다. 파워 스테이지에서는 에번스, 타낙, 라피, 가츠타, 브린이 추가 득점을 가져갔다.
드라이버 포인트에서는 오지에가 190점으로 여전히 1위다. 하지만 2위 에번스(166점)가 핀란드 랠리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치인 30점을 추가하며 마지막 추격의 불씨를 살렸다. 득점에 실패한 누빌은 사실상 타이틀 경쟁에서 밀려났다. 타낙이 2위에 오르고, 누빌과 로반페라의 무득점으로 인해 3~5위는 각각 1점 차이가 되었다.
제조사(매뉴팩처러) 부문에서는 도요타 441점, 현대팀 380점으로 격차가 조금 더 벌어졌다. 올해 WRC는 10월 14~17일 스페인에서 제11전을 치른 후, 11월 18~21일 이탈리아 몬자에서 시즌을 마무리하게 된다.
글. 이수진 (자동차 평론가)
1991년 마니아를 위한 국산 자동차 잡지 <카비전> 탄생에 잔뜩 달아올라 열심히 편지를 보냈다가 덜컥 인연이 닿아 자동차 기자를 시작했다. 글 솜씨 없음을 한탄하면서도 미련을 놓지 못한 것이 벌써 27년이다. <카비전> 편집장을 거쳐 현재는 <자동차생활> 편집장으로 재직 중이다. 전기차와 커넥티드카, 자율주행 기술 같은 최신 트렌드를 열심히 소개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름 냄새 풍기는 내연기관 엔진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자동차 덕후’이기도 하다.
HMG 저널 운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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