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7 현대 모터스포츠팀

현대 월드랠리팀, 벨기에 랠리를 완벽하게 제압하다

현대 모터스포츠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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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월드랠리팀이 벨기에에서 ‘원투 피니시’를 거뒀다. 누빌과 브린의 대활약, 그리고 파워스테이지 포인트까지 더해 51점을 얻은 현대팀은 제조사 챔피언십에서도 선두를 바짝 추격하기 시작했다.

지난 8월 13~15일, WRC 제8전이 새로운 무대인 벨기에에서 열렸다. 정식 명칭은 WRC 렌티스 이프르 랠리 벨지움(WRC Renties Ypres Rally Belgium)이다. 이프르 랠리(Ypres Rally)는 1965년에 시작된 벨기에 대표 랠리 이벤트로, 벨기에 국내 선수권은 물론 유럽 랠리 챔피언십(ERC)과 인터컨티넨탈 랠리 챌린지(IRC) 등에 포함돼 있다. 지난해 팬데믹 사태 속에서 긴급하게 WRC 개최가 확정되었다가 코로나19 확산세 때문에 막판에 취소됐다. 올해 역시 벨기에는 WRC 캘린더에 포함돼 있지 않았지만 영국 랠리가 취소됨에 따라 개최가 극적으로 성사됐다. 덕분에 벨기에는 WRC를 개최하는 35번째 나라가 되었고, 현대 월드랠리팀의 티에리 누빌(Thierry Neuville)과 코드라이버 마틴 비데거(Martijn Wydaeghe)는 모국에서 WRC 경주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

극적으로 열린 벨기에 랠리는 서플랑드르 남부에 위치한 평화의 도시, 이프르에서 펼쳐진다. 사진 : WRC (https://www.wrc.com)

올해 WRC 벨기에 랠리는 무려 108대 엔트리라는 성황을 이루었다. 2015년 프랑스 랠리(125대) 이후 최대 엔트리다. 그중 월드랠리카는 10대이고, 타막 랠리 시리즈인 RGT 소속의 알핀 A110 7대도 포함되어 있다. 랠리 본부가 차려진 이프르(Ypres)는 벨기에 북쪽 플랑드르(Flandre) 지역의 작은 도시로 1차 세계대전의 최대 격전지 중 하나였다. 당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여러 번의 대규모 전투에서는 인류 최초의 대규모 화학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도심은 당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가 종전 후 재건됐다. 이런 이유로 이프르는 현재 ‘평화의 도시’로 불린다.

폭이 좁고 도랑이 여기저기 숨어있는 만큼 한 번만 삐끗해도 곧장 리타이어의 늪에 빠지게 되는 곳이다. 사진 : WRC (https://www.wrc.com)

경주 구간은 총 20개 스테이지 295.78km로 대부분이 이프르 반경 30km 내외에 밀집되어 있다. 참가자들은 밭 사이로 난 좁고 구불거리는 농로를 고속으로 달려야 한다. 도로 주변에는 배수로와 전봇대가 도사리고 있으며, 앞서 달리는 차가 자갈이나 흙을 흩뿌리기도 한다. 현지 경험이 거의 없는 참가자들은 단 두 번의 레키(Recce, 탐색 주행)만으로 상세한 페이스 노트(Pace note)를 작성해야 한다. 시즌 두 번째 타막 랠리인 벨기에는 변화무쌍한 날씨로도 악명이 높다. 비가 내리면 일부 구간은 엄청나게 미끄러워진다. 또한 일요일 결전 장소도 특별하다. 바로 F1 벨기에 그랑프리가 열리는 스파-프랑코샹 서킷이다.

벨기에는 F1과 르망에서 맹활약한 재키 이크스, 그리고 현대팀의 마스코트 티에리 누빌을 배출한 곳이다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와 함께 베네룩스 3국으로 묶이는 벨기에는 상당히 뛰어난 드라이버들을 배출해 왔다. F1에서 8승, 르망에서 6승을 거둔 살아있는 전설인 재키 이크스(Jacky Ickx)를 비롯해 티에리 부첸(Thierry Boutsen), 에릭 반 데 폴(Eric van de Poele) 등이 벨기에 출신이다. 랠리에서는 프랑소와 듀발(Francois Duval)과 프레디 로이크스(Freddy Loix)가 있다. 현대 월드랠리팀에서 2002~2003년 활동했던 로이크스는 이프르 랠리에서 11번이나 우승한 ‘이프르 마스터’다. 그리고 현대팀의 티에리 누빌은 현역 벨기에 드라이버 중 단연 최고의 스타다. 2009년 WRC에 데뷔했으며, 2014년부터 현대팀 소속으로 13승을 기록하고 있다.

벨기에 출신의 누빌 뿐만 아니라 브린도 벨기에에서의 경험이 있어 기대를 걸어볼 만했다

현대팀은 이번 경주에 현지 경험이 풍부한 티에리 누빌을 중심으로 오트 타낙(Ott Tanak)과 크레이그 브린(Craig Breen)을 출전시켰다. 가장 큰 관심을 모은 것은 역시 홈그라운드의 티에리 누빌이다. 벨기에 생비트(St. Vith) 태생인 누빌은 지금까지 이프르 랠리에 7번 출전했으며, 2019년에는 i20 WRC 랠리카로도 달린 적이 있다. 최신 월드랠리카로 벨기에 코스를 경험해 본 유일한 현역 선수인 셈이다. 누빌은 경주 전 “도로가 좁고 미끄러우며, 양쪽에 있는 도랑이 매우 깊습니다. 따라서 네 바퀴가 항상 노면 위에 있도록 유지해야 합니다.”라며 벨기에의 까다로움에 대해 설명했다. 브린 역시 벨기에 경험이 많은 드라이버다. 가장 좋아하는 이벤트 중 하나가 이프르 랠리라는 브린은 2019년 폭스바겐 폴로를 몰고 종합 우승을 차지한 경험이 있다.

한편, 현대팀은 올리버 솔베르그(Oliver Solberg)와 야리 후투넨(Jari Huttunen)을 통해 처음으로 i20 N 랠리2를 실전에 투입했다. i20 N 랠리2는 WRC2와 WRC3의 i20 R5 랠리카를 대체하는 신무기다. 전 세계 랠리판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쳐 온 i20 R5의 후계 모델인 만큼 많은 화제와 관심을 모았다. 현대 C2 컴페티션에서는 피에르-루이 루베(Pierre-Louis Loubet)가 엔트리했다.

도요타에 다소 뒤처져 있었던 현대팀은 더 이상 우승컵을 내주지 말아야 했다

챔피언십 포인트에서 현대팀에 59점 앞선 도요타는 오지에(Sebastien Ogier), 에반스(Elfyn Evans), 로반페라(Kalle Rovanpera), 가츠타(Takamoto Katsuta) 체제를 유지했다. 가츠타는 에스토니아에서 부상을 당한 코드라이버 댄 배리트(Daniel Barritt) 대신 키튼 윌리엄즈(Keaton Williams)를 기용했다. 포드는 거스 그린스미스(Gus Greensmith)와 아드리안 포모(Adrian Fourmaux)을 월드랠리카에 태웠고, 수니넨(Teemu Suninen)은 새로운 피에스타 랠리2 버전을 타고 WRC2에 출전했다.

8월 13일 금요일, 경주는 이프르 주변에 마련된 8개 스테이지(합계 135.34km)에서 시작됐다. 23.62km의 켐멜베르그(SS3, SS7)는 이프르 랠리를 상징하는 스테이지다. 사이클 대회인 ‘스프링 클래식’의 코스로도 유명하며, 수많은 관중이 몰려든다. 다행히 비 예보는 없었다. 여름 내내 서유럽을 괴롭혔던 폭우와 홍수에서 벗어나 따사로운 햇살만이 가득했다.

물 만난 고기인 양, 고향을 찾은 누빌은 랠리 시작부터 실력을 마음껏 뽐냈다. 사진 : WRC (https://www.wrc.com)

현대팀 트리오는 시작부터 맹렬한 스피드로 앞서 나갔다. 오프닝 스테이지를 잡은 것은 타낙이었고, SS2와 SS3에서는 브린이 가장 빨랐다. 홈그라운드의 누빌은 SS4 톱타임으로 종합 선두에 오른 후, 선두 굳히기를 시작했다. 누빌은 신체 컨디션(에스토니아에서는 눈이 아팠다)과 차의 상태 모두 좋았다. 하지만 안경이 자꾸 흘러내리는 의외의 곤욕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의 질주를 막지 못했다.

SS4부터 내리 4연속 톱타임을 기록한 누빌은 금요일을 종합 선두로 마무리했다. 2위 브린과의 시차는 7.6초, 타낙은 누빌에 31.2초 뒤진 3위다. 현대팀이 1~3위를 모두 차지해 라이벌을 압도한 것이다. 타낙은 엔진이 꺼지는 문제가 있었지만 4위 로반페라를 1.4초 차이로 저지했다. 그 뒤로는 에반스, 오지에, 가츠타, 루베 순이었다.

좁은 도로를 고속으로 질주하는 코스 탓에 걸출한 드라이버들이 이프르에서 악몽을 꿔야 했다. 사진 : WRC (https://www.wrc.com)

한편, 금요일은 M스포트에게 끔찍한 하루였다. 아드리안 포모가 SS3 고속 코너에서 구르며 차가 대파되어 경주를 완전 포기했고, 그린스미스는 SS4를 출발하자마자 도랑에 빠졌다. 신형 피에스타 랠리2를 탄 수니넨마저도 타이어가 펑크(펑처) 나고 엔진이 멈췄다. 덕분에 현대팀 솔베르그가 종합 10위, WRC2 클래스 선두에 올랐다. 일몰 시간이 가까운 저녁 8시 48분에 시작될 예정이던 최종 스테이지 SS8은 안전상의 이유로 취소되었다.

8월 14일 토요일 역시 8개 스테이지, 119.92km 구간에서 경주를 벌였다. 오프닝 스테이지 SS9 홀레베케(Hollebeke)는 이번 경주 중 가장 긴 25.86km로, 예년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노면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가 뒤섞여 있고, 노폭도 계속 바뀌는 등 다채로운 컨디션이다.

언뜻 평온해 보이는 코스이지만, 벨기에 랠리에서의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은 큰 사고를 겪기도 했다. 사진 : WRC (https://www.wrc.com)

타낙은 오프닝 스테이지에서 타이어 펑크로 차를 세웠는데 차를 들어 올리는 잭이 고장 나 2분 30초를 잃었다. 이 과정에서 바로 뒤에 붙어 있던 동료 브린에게 길을 내어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브린도 시간적 손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브린은 SS9에서 가장 빨랐고, 이어진 SS10까지 2연속 톱타임을 차지해 누빌과의 시차를 좁혔다. 현대 C2 컴페티션의 피에르-루이 루베는 SS9에서 도랑에 빠져 리타이어를 했고, 도요타의 가츠타는 SS10에서 크게 굴렀는데, 이로 인해 전신주가 도로를 덮치는 바람에 경주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종합 3위인 에반스가 SS11에서 도요타팀의 이번 경주 첫 톱타임을 따냈다. 하지만 2위 브린과의 시차는 30.3초로, 1.1초 줄었을 뿐이다. 누빌은 SS12와 SS14 그리고 마지막 SS16을 잡아 종합 선두 자리를 방어했다. 2위 브린과의 시차는 10.1초다. 브린은 에반스의 맹렬한 추격을 받으면서도 시차를 32.3초로 늘렸다. 3위 에반스 뒤로 로반페라, 오지에, 타낙이 자리한 상황. 도요타 트리오는 3위 자리를 두고 불과 4.3초 차이로 몰려 있다. WRC2로 참가한 현대팀의 솔베르그는 종합 14위, 후투넨은 17위다. 솔베르그는 파워 어시스트 고장으로 스티어링을 양손으로 붙잡느라 코드라이버가 핸드 브레이크를 조작하며 달렸다. 그래도 M스포트의 피에스타 랠리2가 모두 리타이어해 WRC2에서는 현대팀의 듀오만이 살아남았다.

벨기에 랠리의 마지막 날, 오 루즈 코스로 유명한 스파-프랑코샹 서킷에서 승부가 판가름 난다. 사진 : WRC (https://www.wrc.com)

일요일에는 이번 랠리의 하이라이트인 스파-프랑코샹이 있다. F1 벨기에 그랑프리와 내구 레이스인 스파 24시간이 열리는 역사와 전통의 서킷이다. 랠리 본부가 있는 이프르에서 스파-프랑코샹을 가려면 벨기에 국토를 동서로 횡단해 거의 300km를 이동해야 한다. 이 때문에 서킷 패독에 리모트 서비스(Remote service, 서비스 파크가 아닌 외부 서비스 본부)가 마련되었다.

9.05km의 스타블로(SS17, SS19)와 11.21km의 스파-프랑코샹(SS18, SS20) 스테이지 모두 바깥 도로에서 출발해 서킷으로 이어지는 구성이다. 스타블로는 당초 훨씬 길었지만 최근 홍수로 인해 부득이하게 절반 가까이로 줄였다. 스파-프랑코샹 스테이지는 서킷 북쪽에서 출발한 후 유명한 라소스 헤어핀과 오 루즈 코너를 달린다.

제법 여유가 있었음에도 누빌은 방심하지 않고 침착하게 자신만의 레이스를 이어갔다. 사진 : WRC (https://www.wrc.com)

누빌은 도요타 세력과 40여 초의 여유가 있지만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선두를 달리다가 예상치 못한 문제에 직면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오프닝 SS17에서는 오지에가 타이어 펑크로 로반페라와 시차가 9초로 늘어났다. 한편, 솔베르그는 전기 문제로 시동이 걸리지 않아 리타이어를 했다. 따라서 WRC2에는 후투넨만 남게 되었다.

타낙은 SS18과 SS19에서 톱타임을 기록했고, 로반페라는 에반스를 밀어내고 종합 3위에 올라섰다. 브린은 SS19에서 다소 느렸지만 아직 로반페라와 17.5초의 시차가 있다. 3개 스테이지를 달린 후 서비스를 받은 참가자들이 마지막 결전지인 SS20으로 향했다. 하지만 벨기에 최종 스테이지에서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타낙, 오지에, 누빌, 로반페라, 에반스가 1~5위로, 파워 스테이지 추가 득점을 손에 넣었다.

도넛 세레머니를 선보일 정도로 누빌은 자국 랠리에서의 우승을 한껏 만끽했다. 사진 : WRC (https://www.wrc.com)

결국 누빌이 모국에서 펼쳐진 첫 WRC의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올해부터 손발을 맞추고 있는 코드라이버 비데거와 함께 거둔 첫 승리이기도 하다. 비데거에겐 생애 첫 WRC 우승 트로피였고, 고국에서의 우승이라 그 의미가 더욱 깊었다. 팀 오더에 따라 힘을 빼고 달린 브린은 2위에 올랐고, 현대팀은 ‘원투 피니시’로 벨기에를 완벽하게 제압하면서 ‘2연속 제조사 종합 우승’이라는 타이틀 방어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살렸다. 치열한 팀 내 경쟁을 넘어 시상대 마지막 자리를 차지한 것은 로반페라였다. 그리고 에반스, 오지에, 타낙이 뒤를 이었다.

벨기에 랠리를 눈부신 원투 피니시로 장식한 현대팀은 다시 한번 제조사 타이틀을 노린다

누빌과 브린의 대활약, 그리고 파워스테이지 포인트까지 더해 51점을 얻은 현대팀은 도요타와의 제조사 챔피언십 포인트 격차를 41점으로 줄였다. 아직 네 라운드가 남아있기 때문에 충분히 뒤집을 수 있는 점수 차다. 드라이버 부문에서는 누빌이 28점을 더해 에반스와 같은 124점이 되었다. 오지에와 38점 차이다. 토요일 트러블로 3위 자리를 잃은 타낙은 6위 8점과 파워 포인트 5점에 만족해야 했다.

9월 9~12일 열리는 WRC 제9전은 근대 문명의 발상지 그리스에서 열린다. 그리스는 벨기에 이프르와 함께 예비 후보 중 하나였다. 하지만 WRC 신참인 이프르와 달리 그리스는 역사와 전통의 이벤트로, 거칠고 빠른 산악 도로에서 극한의 내구성을 시험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글. 이수진 (자동차 평론가)

1991년 마니아를 위한 국산 자동차 잡지 <카비전> 탄생에 잔뜩 달아올라 열심히 편지를 보냈다가 덜컥 인연이 닿아 자동차 기자를 시작했다. 글 솜씨 없음을 한탄하면서도 미련을 놓지 못한 것이 벌써 27년이다. <카비전> 편집장을 거쳐 현재는 <자동차생활> 편집장으로 재직 중이다. 전기차와 커넥티드카, 자율주행 기술 같은 최신 트렌드를 열심히 소개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름 냄새 풍기는 내연기관 엔진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자동차 덕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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