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마지막 주말을 앞두고 이번 WRC 시즌에서 가장 흥미로운 랠리가 시작됐다. 바로 2021 WRC 6라운드인 사파리(케냐) 랠리다. 근래에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WRC가 열리지 않았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로코와 케냐가 있다. 그중에서도 케냐의 사파리 랠리는 개최 횟수(29회)로만 따져도 이탈리아나 스페인 랠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전설적인 이벤트다. 1953년에 처음 열린 사파리 랠리는 1973년 WRC에 합류했지만 재정 악화와 치안 문제로 2002년을 마지막으로 캘린더에서 사라졌다.
사파리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사파리 랠리는 야생의 대지를 달리며 높은 기온과 거친 노면, 변화무쌍한 환경 등과 싸워야 하는 것으로 악명이 자자하다. 말 그대로 살아남는 자가 승리하는 서바이벌 경기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02년 경기에서는 37대가 리타이어하고 고작 11대만이 살아남았다. 당시에는 하나에 100km가 넘는 스테이지가 흔했고, 이동거리를 합친 총 주행거리가 5,000~6,000km에 달했다. 애초 사파리 랠리는 지난해 부활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 사태로 부득이하게 일정을 미루어 올해 열렸다.
사파리 랠리의 노면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칠다. 비가 내리면 흙 길이 순식간에 진창으로 돌변하고, 야생동물도 심심치 않게 튀어나온다. 이 때문에 예전에는 헤드램프 보호용 철망이나 엔진에 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스노클을 달기도 했다. 근 20년 만에 돌아온 사파리 랠리는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길이가 짧아져 가장 긴 스테이지라도 30km 정도이고 경기구간 합계 320.19km, 총 주행거리는 1,133.94km다. 다른 라운드와 비슷한 수준이지만, 예전에 비하면 1/5로 줄어든 셈이다. 그럼에도 사파리 랠리는 여전히 위험하며, 현역 선수 누구도 경험하지 못해 본 생소한 환경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서비스 파크는 케냐 수도 나이로비에서 북서쪽 100km 떨어진 나이바샤(Naivasha) 호수 인근에 세워졌다. 현대 월드랠리팀은 이탈리아 랠리에 출전했던 티에리 누빌과 오트 타낙, 그리고 다니 소르도를 다시 투입했다. 연속 리타이어로 도요타와 점수 차가 벌어진 현대팀으로서는 반드시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하는 상황이다.
참고로 현대팀은 유럽 이외 지역에서 테스트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 포르투갈 남부 그레블 코스를 달리며 준비작업에 매진했다. 포르투갈 랠리 참가 후 코로나 자가격리 때문에 이탈리아 랠리를 건너뛴 신예 올리버 솔베르크(Oliver Sorberg)는 현대 C2 컴페티션을 통해 월드 랠리카로 그레블 랠리에 처음 도전한다(포르투갈 그레블에서는 i20 R5를 몰았다). 부친이자 전 WRC 챔피언인 페터 솔베르크(Peter Solberg)는 1999년 사파리 랠리에서 WRC 데뷔전을 치른 인연이 있다. 당시 성적은 5위였다.
현대팀에게 케냐가 처음은 아니다. 마지막 사파리 랠리였던 2002년에 3대가 출전했고, 아르민 슈워츠(Armin Schwarz)와 프레디 로이크스(Freddy Loix)가 리타이어하고, 유하 칸쿠넨(Juha Kankkunen)이 8위로 완주에 성공했다. 당시 현대팀은 WRC에 참전 중(2000~2003 시즌)이었다. 다만 사파리 랠리는 전용 경주차를 개발해야 하고 비용 부담도 커 처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도요타와 포드는 상대적으로 오랜 경험과 전적이 있다. 특히 도요타는 1984년부터 1995년까지 케냐에서 8번이나 우승했다. 하지만 올해는 세바스티앙 오지에(Sebastien Ogier)와 엘핀 에반스(Elfyn Evans)가 챔피언십 포인트 1, 2위여서 경기 초반 코스 청소를 도맡아야 한다. 도요타의 3번째 차는 이번에도 칼리 로반페라(Kalle Rovanpera)가 몰고, 도요타의 육성 드라이버인 타카모토 가츠타(Takamoto Katsuta)도 나온다.
포드는 1999년과 2002년 케냐의 승자(드라이버: 콜린 맥레이)다. 이번 경주에는 M 스포트 포드의 리차드 밀너 감독을 포함한 대부분의 스텝이 본사가 위치한 영국에서 원격 지휘하는 독특한 방식을 시도했다. 코로나로 인한 비용 상승 문제와 케냐 방문자에 대한 영국의 자가격리 지침을 따라야 했기 때문이었다. M스포트 포드는 사파리에 고정 드라이버나 다름없는 그린스미스(Gus Greensmith) 외에 포르투갈에서 좋은 성적을 냈던 신예 아드리안 포모(Adrien Fourmaux)를 투입한다. 다른 한 대의 경주차에는 로렌조 베르텔리(Lorenzo Bertelli)를 태웠다. 로렌조 베르텔리는 패션 브랜드 ‘프라다’의 후계자로, 도요타의 가츠타와 마찬가지로 득점을 해도 제조사 챔피언십 점수에는 합산되지 않는다.
이 밖에도 이번 사파리 랠리에는 흥미로운 참가자가 또 있었다. 유럽 랠리 챔피언을 3번이나 차지했던, 올해 91세의 폴란드 백전노장 소비에스와프 자사다(Sobiesław Zasada)가 출전한 것이다. 소비에스와프 자사다는 지금까지 WRC에 6번 참가했고, 1972년 사파리 랠리에서는 2위에 올랐으며 이번에는 포드 피에스타 랠리3로 출전해 최고령 WRC 드라이버 기록을 경신했다.
월요일과 화요일에 걸쳐 코스를 탐사하며 페이스 노트를 작성한 참가자들은 전설적인 랠리의 어려움을 비로소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폭이 좁은 데다, 풀과 돌에 가려 때때로 길을 찾을 수 없었다고 호소했다. 속도를 늦추면 기록에서 손해를 보고, 반대로 몰아붙이면 코스를 벗어나거나 차가 버텨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번 쉐이크다운 테스트는 평소보다 이른 수요일이었다. 서비스 파크 인근에 마련된 코스는 사파리 랠리의 특징과 어려움을 함축적으로 보여주었다. 5.4km의 짧은 구간에서 올리버 솔베르크는 서스펜션이 파손되었고, 로렌조 베르텔리는 라디에이터가 부서졌다.
6월 24일 목요일, 나이로비 시내 컨벤션 센터에서 세레모니얼 스타트 후 북동쪽으로 도심 외곽으로 이동해 경주를 시작했다. 2대가 함께 출발하는 4.84km의 카사라니(Kasarani) 슈퍼 스페셜 스테이지에서는 오지에가 3분 21초 5의 톱타임으로 종합 선두로 올라섰다. 2위 로반페라, 3위 에반스로 도요타 트리오가 톱3에 올랐다. 현대팀은 타낙이 선두에 2.5초 뒤진 4위, 누빌이 5초 차로 5위였고, 소르도는 11위를 기록했다.
6월 25일 금요일엔 나이바샤 호수 인근의 넓은 평원에서 본격적인 ‘사파리’ 랠리가 시작됐다. 3개 스테이지를 반복해 달리는 SS2~SS7 129.78km 구간 중에서 32.68km의 케동(Kedong, SS3/SS6)이 이번 경기 최장 스테이지다. 추이 로지(Chui Lodge, SS2/SS5)와 오세리안(Oserian, SS4/SS7)은 온갖 야생 동물이 뛰어노는 오세렌고니 야생동물 보호구역(Oserengoni Wildlife Sanctuary)에 인접해 있다.
금요일 오전에는 현대팀이 반격에 나섰다. 누빌이 SS2에서 9분 47초 7의 톱타임으로 종합 선두에 올랐다. 이어진 SS3 케동에서는 도요타의 에반스가 덤불 속에 숨어있던 바위를 치고 주저앉았고, 도요타의 에이스인 오지에도 손상을 입었다. 하지만 소르도도 피니시 4km를 남기고 리어 서스펜션이 부서져 리타이어했다. 참고로 솔베르크와 베르텔리는 SS4를 완주하지 못하고 멈추어 섰다.
많은 선수들이 사파리의 악명을 체감하는 사이 누빌이 종합 선두를 질주했다. 오후 SS5와 SS6에서 로반페라가 잠시 선두로 나섰지만, SS6 케동에서 누빌이 다시 선두에 올랐다. SS7에서 누빌은 타이어 펑쳐(펑크)로 상당히 손해를 보고, 엔진에 이상이 있었음에도 종합 선두 자리를 지켰다. 누빌은 금요일을 마감한 후 “오늘은 좋은 무대였다. 펑쳐가 2번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노면은 몹시 거칠고 큰 돌이 있었다. 다행히 잘 피해 서비스로 복귀했다. 내일 역시 힘든 하루가 예상되므로 랠리카를 꼼꼼히 정비해 준비해야 한다. 토요일은 오늘과는 성격이 달라 더 많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소감을 남겼다.
누빌을 바짝 추격하던 도요타의 로반페라는 먼지에 시야가 가리면서 흙에 빠져 탈출할 수 없었다. 페시페시(fesh-fesh)라 불리는 부드러운 흙은 때론 랠리카를 옭아매는 함정이 된다. 이로 인해 로반페라는 리타이어를 했고, 가츠타는 종합 2위에 올라섰다. 누빌과의 시차는 18.8초. 3위 타낙은 타이어 펑크에 발목을 잡혀 순위를 높일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60% 이하의 페이스로 달렸다는 타낙은 일부 구간에선 그마저도 너무 빨랐다며 혀를 내둘렀다. 오일 캐니스터 파손으로 페이스가 떨어진 오지에는 타낙에 56초 뒤진 4위였으며, M스포트 포드의 그린스미스와 포모가 그 뒤를 이었다.
6월 26일 토요일에는 북쪽 엘멘테이타 호수 인근으로 이동해서 경주를 치렀다. SS8~SS13의 6개 SS 합계 주행거리는 132.08km로, 3개 스테이지를 2번 반복하는 구성이다. 소이삼부(Soysambu, SS9/SS12) 스테이지는 예전 사파리 랠리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무대로, 속도를 낼 수 있는 긴 직선과 미끄러운 코너, 그리고 거친 노면이 혼합돼 있다. 길의 경계가 애매한 데다 페이스 노트를 만들 때와 환경이 많이 달라져 있어 대부분의 선수들이 길 찾기에 어려움을 겪었다.
오프닝 스테이지인 엘멘테이타(Elmenteita)에선 누빌이 톱타임으로 추격자들과의 거리를 벌렸다. 야생동물이 많이 출몰하는 SS9에서는 오지에가 가장 빨랐고 포모와 누빌, 타낙이 그 뒤를 따랐다. 오지에는 오전의 2개 스테이지를 잡아 종합 3위였던 타낙을 압박했다. 금요일에 리타이어했던 소르도와 에반스, 로반페라, 베르텔리 등도 무대로 돌아왔다. 타낙은 SS10, SS11를 2위로 마친 후 SS12에서 톱타임을 기록하며 종합 2위인 가츠타를 바싹 추격했다.
참가자들은 거친 자연에 조금씩 적응해 갔다. 하지만 사파리는 아직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준 상태가 아니었다. 토요일의 마지막 SS13, ‘Sleeping Warrior’라는 의미심장한 이름의 스테이지는 사파리의 또 다른 면모를 드러냈다. 하늘에 낀 먹구름이 갑작스런 비를 뿌리면서 노면은 진창으로 변하고, 하드 타이어는 그립을 잃었다. 타낙은 폭우 속에서 시야가 완전히 가린 데다, 운전석 스크린 히터가 작동하지 않아 1분 가까이 손해를 봤다. 누빌은 비교적 마른 길을 달린 오지에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다소 공격적으로 달렸고, 덕분에 종합 선두를 유지하면서 토요일을 마감할 수 있었다. 타낙은 4위로 떨어져 5위 그린스미스와 18.2초 차이다.
일요일은 다시 나이바샤 호수로 돌아와 SS14~SS18, 53.49km 구간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5개 SS는 모두 10km 남짓한 단거리 스테이지지만 난이도가 높았다. 숲이 우거진 롤디아(Loldia)와 호수 남쪽의 헬스 게이트(Hells Gate)를 달린 뒤, 거친 돌이 많은 말레와(Malewa) 스테이지로 이어진다. 이후 다시 롤디아와 헬스 게이트를 반복해야 하는 상황이다. 파워 스테이지를 겸하는 10.56km의 헬스 게이트는 이번 경기 중 가장 높은 해발 2,200m 이상을 오른다.
종합 1위 누빌은 2위 가츠타에 거의 1분을 앞선 상태로 일요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우승의 꿈은 순식간에 악몽으로 바뀌었다. 오프닝 스테이지 SS14에서 서스펜션이 크게 파손되며 더 이상 경기를 이어갈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따라서 가츠타와 오지에가 선두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게다가 SS15 헬스 게이트가 정찰 도중 문제가 확인되어 후반 절반 가량이 단축됐다. 오지에는 이곳에서 가츠타를 바싹 추격해 SS16에서 완전히 나란히 섰고, 타낙은 1분 9초 차이로 종합 3위에 올랐다. 4위 포모가 SS17에서 톱타임으로 추격했지만 타낙은 아직 23초 가량 여유가 있다. 이제 경기는 파워 스테이지를 겸하는 SS18 하나만 남겨둔 상태다.
오전에 단축 운영했던 헬스 게이트는 SS18에선 10.56km의 원래 코스대로 진행되었다. 오지에는 시즌 4승째를 거두며 133점으로 챔피언십 선두 자리를 더욱 굳건히 했다. 가츠타는 개인통산 최고인 2위를 거두었다. 토요일에 위기를 맞았던 타낙은 결국 3위로 포디움에 올랐다. 아울러 최종 파워 스테이지에서 추가 점수 5점을 챙겨 누빌과의 점수 차이를 8점으로 좁혔다. 제조사 챔피언십에서는 가츠타가 아니라 로반페라의 점수가 합산되기 때문에 도요타 273점, 현대팀 214점으로 10점만 벌어졌다.
WRC 7라운드는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 7월 15~18일 에스토니아에서 열린다. 지난해 비상사태 속에서 캘린더에 들어온 에스토니아 랠리는 이제 WRC에 완전히 뿌리를 내린 모습이다. 물론 오트 타낙이라는 에스토니아 출신의 걸출한 스타 드라이버가 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지난해 에스토니아에서 우승을 차지한 오트 타낙. 올해는 홈그라운드에서 어떤 활약을 펼칠지 기대된다.
글. 이수진 (자동차 평론가)
1991년 마니아를 위한 국산 자동차 잡지 <카비전> 탄생에 잔뜩 달아올라 열심히 편지를 보냈다가 덜컥 인연이 닿아 자동차 기자를 시작했다. 글 솜씨 없음을 한탄하면서도 미련을 놓지 못한 것이 벌써 27년이다. <카비전> 편집장을 거쳐 현재는 <자동차생활> 편집장으로 재직 중이다. 전기차와 커넥티드카, 자율주행 기술 같은 최신 트렌드를 열심히 소개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름 냄새 풍기는 내연기관 엔진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자동차 덕후’이기도 하다.
HMG 저널 운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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