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현대자동차는 인도네시아에 연간 25만 대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짓겠다고 밝혔다. 투자 금액은 약 1조 8,000억 원. 2017년 합작회사 형태로 설립한 베트남 공장이 연 10만 대를 생산할 수 있는 것에 비하면 2.5배 규모다. 그리고 이번 인도네시아 공장의 경우 합작회사 형태가 아닌 단독 투자라는 점이 포인트다. 인도네시아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오래 전부터 진출한 일본 자동차 브랜드의 텃밭이어서 만만치 않은 도전이 예상된다. 그렇다면 현대차는 왜 아세안(ASEAN) 국가 중 인도네시아를 집중 공략지역으로 선정했는지, 아세안 시장 전략은 무엇인지 들여다봤다.
글로벌 자동차 수요 감소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잘 알려진 현상이다. 이는 모든 자동차 제조사들이 직면한 문제다. 하지만 아세안 같은 신흥 시장, 특히 인도네시아의 잠재력은 높게 평가 받고 있다. 일반인은 ‘발리의 나라’정도로 인식하고 있을 지 모르겠지만, IMF의 2019년 자료에 따르면 인도네시아는 GDP 1.12조 달러로 세계 16위의 주요 신흥국이다(한국은 1.63조 달러로 12위). 한가지 더 주목할 점은 인도네시아의 경제성장률이 매년 5%에 육박하는 데다, 인구 평균 연령이 29세로 아주 젊다는 것이다.
성장하는 시장, 젊은 시장에서는 모든 소비에 활력이 붙는다. 특히 이동의 자유는 젊은 소비층에게 중요한 요소다. 인도네시아 자동차산업협회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에서는 지난해 약 103만 대의 자동차가 팔렸으며, 이는 아세안 국가 중 최대 수치다. 올해 판매량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시장조사업체 BMI(Business Monitor International) 리서치는 2022년 인도네시아 자동차 판매는 약 146만 대, 생산은 163만 대 규모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앞으로 5년간 매년 6% 이상 성장하며 아세안 시장 1위로 떠오를 예정이다.
게다가 인도네시아는 자동차 보급율도 낮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인도네시아는 인구 1,000명 당 자동차 보유 대수가 86대에 불과하다(2017년 기준, 세계 82위). 또한 더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차에 대한 구매 욕구가 큰 편이다. 적도 근처의 나라에서 도보로 이동한다는 건, 고문에 가깝기 때문이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자동차 판매가 크게 늘어날 것이 확실하다.
인도네시아의 자동차 판매량 증가를 예측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는 도로 인프라의 비약적인 발전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인도네시아의 도로 사정은 열악했다. 현재 수도인 자카르타가 있는 자바섬의 경우 동서로 길게 뻗어 있지만, 제대로 된 고속도로가 없어 물류의 이동은 물론 인력의 이동도 쉽지 않았다.
인도네시아는 자바섬의 동서를 관통하는 총 1,150km의 고속도로를 공사 중이다. 2021년(예정) 도로가 완공되면 자바섬 동쪽에서 서쪽까지 약 20시간 걸리던 이동시간이 약 15시간 정도로 줄어든다. 자바섬뿐만 아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동시다발적으로 대규모 고속도로 건설에 나서고 있다. 이 계획이 실현되면 인도네시아 전국의 고속도로망은 현재 대비 3배 수준으로 확장된다.
사실 인도네시아는 전통적으로 일본 자동차 회사들의 점유율이 높은 시장이다. 지금도 인도네시아 시장의 일본차 회사 점유율은 95%에 이른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인도네시아의 높은 관세가 있다. 인도네시아는 수입 완성차에 대한 관세가 상당히 높은 국가 중 하나다. 일본 브랜드가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아세안 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던 이유는, 1980년대부터 현지 생산을 꾸준히 이어온 덕분에 관세의 영향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상황이 달라졌다.
2019년 11월 25일,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CEPA(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를 맺었다. CEPA는 시장 개방과 함께 경제협력에도 무게를 두는 협정이다. 이번 협정을 통해 한국이 인도네시아에 수출하는 주요 품목 대부분의 관세가 즉시 철폐 혹은 단계적으로 철폐된다. 그리고 한국은 인도네시아로부터 최혜국대우(두 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제3국에 부여하고 있는 조건보다 불리하지 않은 대우를 해 주는 것)를 받는다. 다른 나라가 인도네시아와 무역할 때 한국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스레 우리 기업들의 인도네시아 시장 진입에도 물꼬가 트였다. 현대자동차그룹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엔지니어링은 보르네오 섬의 정유공장 고도화 프로젝트에서 지분 약 55%를 가져가며 2조 6,000억 원 규모의 공사를 수주했다. 또한 현대건설은 인도네시아 국영건설업체와 손잡고 현지 국책사업에 참여할 예정이다. 참고로 인도네시아는 극심한 대기오염과 교통정체 때문에 수도를 현재 자카르타에서 보르네오 섬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현대차는 이번 협정으로 자동차 강판에 쓰이는 철강제품(냉연, 도금, 열연 등)과 자동차 부품(변속기, 선루프 등)의 관세 폐지 혜택을 받는다. 자동차 생산을 위해 인도네시아로 부품을 보낼 때 생길 수 있는 문제가 줄어든 것이다.
인도네시아가 이렇게 다른 나라와 경제 협정을 맺고 해외 기업들을 유치하는 건, 전에 없는 큰 변화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는 현재 국가가 주도하는 개발 계획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이 2018년 5월, 인도네시아 정부가 발표한 ‘메이킹 인도네시아 4.0’ 로드맵이다. 국가가 주도해 거대한 산업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으로, 이 로드맵의 핵심은 자동차와 전자, 화학 등이다.
이런 로드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정부는 해외 기업들의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있다. 투자를 유치하면 일자리가 생기고, 더 많은 세금을 걷을 수 있다. 이때 가장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분야가 자동차 산업이다.
또한 완성차 공장을 유치하면 각종 자동차 부품, 전기차용 배터리, 타이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추가 투자를 유치할 수 있다. 아울러 전략적 협업과 기술 이전 등을 통해 자동차 제조와 개발의 토대를 닦을 수도 있다. 인도네시아는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원료인 니켈의 세계 최대 생산국이며, 동시에 코발트, 리튬 등도 풍부한 자원 부국이다. 인도네시아 정부 입장에서는 전기차 제조 계획을 세우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인도네시아 정부는 대기오염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특히 수도인 자카르타의 대기오염이 심각한데, 교통정체 영향이 크다. 대기질 정보 분석회사인 에어비주얼(AirVisual)의 2018년 자료에 따르면 자카르타의 대기오염 정도는 전 세계 수도 가운데 10번째로 심각하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전기차와 수소전기차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다.
현대차는 세계 최초로 수소전기차를 양산하는 등 친환경차 분야를 선도하는 기업이다. 특히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자동차 라인업이 탄탄하다. 친환경차 분야에서 인도네시아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현대차 아이오닉 일렉트릭을 도입한 인도네시아 그랩의 리드즈키 크라마디브라타 대표는 “그랩 전기차 출범은 인도네시아의 미래 교통수단으로 좋을 뿐만 아니라, 환경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와 현대차 등의 협력이 필요하다”라고 밝힌 바 있다.
지금껏 아세안 시장은 국가마다 관세 차이가 상이해 진출이 어려웠다. 하지만 2018년 아세안무역협정(AFTA)으로 인해 회원국 간의 관세 장벽이 사라졌다. 부품 현지화 비율이 40%를 넘을 경우 완성차에 대한 무관세 혜택이 주어진다.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생산한 자동차를 회원국 전체에 무관세로 수출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차의 인도네시아 공장은 자카르타에서 동쪽으로 약 40km 떨어진 브카시(Bekasi)의 델타마스공단에 세워진다. 그리고 공장으로부터 약 60km 거리에 탄중 프리옥(Tanjung Priok)이라는 인도네시아 최대의 항만이 있다. 완성차를 실어서 인도네시아 곳곳에 보낼 수 있는 것은 물론, 말레이시아와 태국, 싱가포르 등으로도 수출이 쉽다. 성장 가능성이 큰 내수 시장과 무관세, 그리고 운송까지. 인도네시아는 아세안 시장 공략을 위한 생산 기지로서 최적의 요건을 갖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현대차그룹은 2018년 싱가포르 기반의 동남아 최대 카쉐어링 서비스 그랩에 2억 7,500만 달러(약 3,000억 원)를 투자했다. 자카르타에서 아이오닉 일렉트릭 20대가 운행 중이며, 이는 점점 더 늘어날 예정이다. 그리고 이젠 베트남 10만대 공장에 더해 인도네시아 25만대 생산 공장을 짓고 시장 확장에 나선다. 일종의 아세안 벨트를 구축한 셈이다. 시장 다각화가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지금, 인도네시아 시장을 교두보로 펼쳐나갈 현대차의 도전이 어떤 성과를 거둘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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